전통은 박제가 아닌 감각이다 — 경주 교동에서 그 깊이를 맛보다
시간을 차리는 식탁
경주의 길은 곧 기억의 시간이다. 도로와 담장, 골목과 대문의 굴곡은 천년이 넘는 시간을 감싸고 흐른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어떤 이에게는 건축의 언어로, 누군가에게는 풍경의 윤곽으로 다가오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음식과 술이라는 감각의 매개로 스며든다.
경주 교동, 한옥이 밀집한 이곳에서 ‘요석궁 1779’는 시간을 차리는 식탁을 펼쳐낸다.
이곳은 단순한 한식당이 아니다. 신라 요석공주가 원효대사와 만난 궁터이자, 설총이 태어난 자리이며, 조선 말기 최부잣집이 1779년 터를 잡아 250년을 이어온 역사 위에 세워진 감각적 식탁이다. 궁중의 위의(威儀)와 사대부의 격식, 지역민과 함께 나눈 삶의 관용이 한 상에 오롯이 담긴다.
요석궁은 ‘시절식(時節食)’이라는 독창적인 방식을 통해 절기에 맞는 식재료를 엄선하고, 대대로 전해온 반가 조리법을 바탕으로 계절의 흐름을 접시에 새긴다. 각 요리는 ‘행(行)’이라는 단위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제공되며, 음식마다 교체되는 식기와 연출이 오감을 자극한다.
특히 사용되는 식기는 경주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형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도예 작가들의 작품으로, 손끝의 촉감과 시각적 리듬까지 식사의 일부로 구성된다.
한 끼 식사가 미각만이 아니라 청각, 시각, 후각, 촉각을 아우를 수 있을까. 요석궁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음식이 차려지는 순간의 침묵, 식기 놓임 새의 질서, 절제된 색감과 그릇의 음률, 그리고 지역 식재료가 지닌 향기까지. 식탁은 곧 풍경이 되고, 식사는 기억이 된다.
여기에 더해지는 마지막 한 모금의 술은, 그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하는 예식이다.
기억을 따르는 술 – 대몽재 1779
요석궁 1779의 식탁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대몽재(大夢齋) 1779’라는 이름의 이 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대몽재’는 ‘큰 꿈을 꾸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경주 최부잣집이 대대로 이어온 가양주의 이름이다.
교동의 고택에서 실제로 빚어진 이 술은 신라 귀족과 화랑들이 마셨다는 비주(秘酒), 곧 ‘법주(法酒)’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교촌도가에서 생산되는 대몽재 1779는 매달 단 300병만 생산되는 최부자 집안의 가양주다.
사용되는 쌀은 경주 평동에서 직접 재배한 국내산 햅찹쌀이며, 빚는 물 역시 지역 내에서 길어 올린 청정수만을 고집한다. 양조에는 오직 찹쌀, 물, 누룩 세 가지 재료만을 사용하며, 저온에서 100일간의 숙성을 거쳐 완성된다. 빠름이 미덕이 된 시대에, 이 술은 오히려 기다림을 통해 미감을 완성한다.
이 술은 결코 자극적이지 않다. 혀에 먼저 닿는 건 산뜻한 과일향과 은은한 곡물의 부드러움이다. 이후로는 숙성 발효 특유의 풍미가 길게 여운을 남기고, 수작업으로 빚은 유리병의 굽과 곡선은 술의 움직임마저 부드럽게 감싼다. 시각과 미각, 후각이 조화롭게 수렴되는 경험. 이것이 대몽재 1779가 주는 술맛이다.
더불어, 이 술의 배경에는 ‘전통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교촌도가는 단순히 옛 방식의 주조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효의 섬세한 변화 과정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고 분석하며, 현대의 품질 기준과 감각에 맞게 재구성해낸다.
이 술은 전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원이 아닌, 신중한 해석과 감각의 결과물이다.
생막걸리의 이름으로 전하는 마음
요석궁에서 한 상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한 잔은 ‘대몽재 생막걸리’다.
이 술은 기존의 시판 제품이 아닌, 오직 이곳만을 위해 특별하게 양조된 생막걸리로, 경주 지역의 양조장을 통해 생산된다.
사용하는 쌀은 국산 햅쌀로, 일반적인 전통 누룩에 곡물 특유의 부드러움을 살리는 배합이 더해져 있다. 적절한 산미와 미세한 탄산, 뚜렷한 곡물의 향이 조화를 이루며, 기존의 묵직하거나 텁텁한 막걸리와는 결을 달리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련되고 현대적인 생막걸리다.
이 술은 요석궁의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단순히 맛있는 막걸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의 마지막 인상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작동한다.
약주의 절제된 우아함 뒤에 따라오는 생막걸리 한 잔은, 다소 캐주얼하면서도 정겨운 마무리다. 기억에 남는 식사의 여운처럼, 그 술의 온기가 오래 남는다.
하우스 오브 초이 – 전통을 공간으로 번역하는 실천
요석궁과 대몽재,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설계한 ‘하우스 오브 초이(House of Choi)’는 단순한 외식 브랜드가 아니다. 이들은 전통을 외관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실질적 감각으로 환원하려는 일관된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하우스 오브 초이는 경주의 고택을 하나씩 복원하며, 그 안에서 전통을 일상 속 감각으로 되살리고자 한다. 한옥을 단순한 ‘콘셉트 공간’이 아니라, 삶이 흐르는 실질적인 장소로 환원하고, 그 안에 음식, 술, 서비스, 향, 소리 등 총체적인 경험 요소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철학은 단순한 미니멀리즘이 아니다. 전통이란 단어에 붙는 피로감을 걷어내기 위해, 불필요한 화려함 대신 절제와 여백, 그리고 감각의 세공을 추구한다. 오히려 그 감각의 섬세함이 더 오래 남는다.
하우스 오브 초이가 전통을 대하는 방식은 곧 미각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명확한 한 줄 슬로건이 없고, 설명이 과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강하게 각인되는 어떤 설계가 있다.
전통은 박제가 아니라 감각이다
전통을 재현하는 일은 박물관적 태도가 아니라 감각의 해석일 수 있다. 요석궁과 대몽재, 그리고 그 바탕에 있는 하우스 오브 초이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전통을 동시대의 언어로 번역해 낸다.
그들에게 전통은 결코 ‘그 시절의 것’이 아니다. 지금 이곳, 이 계절, 이 식탁에 앉은 사람들에게 작동하는 감각의 코드다. 맛과 온도, 질감과 여운으로 전해지는 감각의 언어는 때때로 말보다 더 진한 기억을 남긴다.
‘미식’이란 단어를 단순히 고급 음식의 대명사로 쓰지 않고, 감각의 깊이를 뜻하는 단어로 환원하고자 한다면, 이들이 만들어낸 공간은 그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
요석궁의 음식은 눈을 사로잡기보다, 혀를 설득한다. 대몽재의 술은 향보다 기억을 남긴다. 그리고 하우스 오브 초이는 이 모든 것을 공간이라는 무대 위에 조용히 펼쳐낸다.
※ 이 글은 정식 언론사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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