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식탁 위, 스페인의 숨결을 입히다
엘쁠라또는 단어 그대로 ‘접시(el plato)’를 뜻한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단순한 번역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브랜드 철학이자 지향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2006년 브랜드를 구상한 창업자의 질문에서 출발해, 서울 양재천의 한 자리를 오랜 시간 지켜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왜 수십 년간 사랑받는 양식 브랜드는 드물까? 왜 노포의 계보는 대부분 한식이나 중식에만 머무는가?
엘쁠라또는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바래기보다, 현재성 속에서 여전히 설득력 있는 맛을 전하고자 했다. 그래서 ‘영원한 신인’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오늘 처음 찾은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오랜 단골에게는 여전히 기대되는 경험이 되기 위한 선택. ‘접시’라는 단어는 그래서 일상적이되 보편적이고, 낯설지 않되 시대를 초월한 무게를 지녔다.
엘쁠라또의 주방은 오랜 시간 한 사람의 손끝에서 방향을 잡아왔다. 황재원 셰프는 2011년 엘쁠라또에 입사한 이후, 중간의 짧은 해외 체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현재는 엘쁠라또의 총괄 셰프로서 주방과 메뉴 전반을 이끌고 있다.
그에게 요리의 시작은 특별한 계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가까웠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 이전부터 요리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적부터 품었던 막연한 확신은, 오랜 시간의 축적과 경험을 거쳐 지금의 자리를 만들었다.
처음 엘쁠라또에 들어섰을 때 그는 스페인 요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 요리를 계속하며, 자연스럽게 ‘왜’와 ‘무엇’을 묻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스페인 요리가 지닌 구조와 방향성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처음에는 클래식한 스페인 요리를 구현하는 데 집중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 요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게 됐죠. 결국 답은 ‘재료’였어요.”
엘쁠라또가 스페인을 재현하는 공간이 아니라, 스페인을 경유해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가장 적절한 맛을 제안하는 이유다. 셰프는 스페인의 조리법을 존중하되, 한국에서 가장 좋은 식재료를 선택해 조리하고자 한다. 그렇게 엘쁠라또는 스페인 요리를 번역하지 않고, 맥락 속에 재구성한다.
엘쁠라또의 음식은 겉으로는 단정하고 미니멀하지만, 그 안에는 복잡하고 진지한 고민이 응축되어 있다.
이 접시들은 단지 맛있는 음식을 넘어, 하나의 계절을 말하고, 관계를 말하며, 철학을 말한다. 셰프의 설명을 바탕으로 일곱 가지 요리를 소개한다.
토마토와 수박, 부라타치즈
농장의 토마토와 허브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여름 요리. 토마토를 저온 건조해 감칠맛을 끌어낸 뒤, 캐러멜 토마토 주스에 수박을 절여 균형을 맞췄다. 여기에 신선한 허브와 부라타 치즈, 캔디 피칸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구운 로메인, 하몽, 계란
농장의 로메인을 원형 그대로 살리기 위해 두태기름을 발라 짧게 그릴링했다. 아삭함을 살리면서도 깊은 풍미를 입혔고, 계란 시저 드레싱과 허브를 곁들여 조화로움을 더했다.
가지구이
엘쁠라또 오픈 이래 줄곧 사랑받아온 고정 메뉴. 팬에서 굽고, 그릴링으로 수분과 기름을 빼내어 식감과 향을 조절한다. 가지 특유의 텍스처를 가장 잘 살려낸 대표 요리다.
제철 생선 세비체
고수가 많이 나는 여름철 농장에서 착안했다. 고수 향을 부드럽게 살리기 위해 아보카도 무스와 세비체 주스에 갈아 넣었고, 산지에서 공급된 생선을 날마다 선별해 사용한다. 식물성 향신료의 밸런스가 돋보이는 메뉴다.
굴튀김과 아도보 소스
선도 좋은 삼배체 굴을 튀겨 바삭함을 살리고, 향신료와 비네거가 들어간 아도보 소스로 풍미의 균형을 맞췄다. 굴의 부담을 낮추고자 튀김으로 접근한 대중 친화적 메뉴이기도 하다.
빠에야
클래식 조리법을 따르되, 한국의 환경에서도 구현 가능한 재료로 만든다. 엘쁠라또에서는 스페인산 ‘봄바쌀’ 대신, 국내산 쌀 품종을 조리법에 맞게 조정해 사용한다. ‘재해석’보다는 ‘존중’의 방식으로 접근한 이 메뉴는 스페인의 정통성과 한국 식재료의 연결을 보여준다.
쏘렐 아이스크림과 사과 폼
농장에서의 감정을 디저트로 풀어낸 메뉴. 산미 있는 쏘렐 잎을 활용해 만든 아이스크림에 사과 폼과 뿌리채소를 곁들인다. 계절의 흐름을 그대로 담아낸 접시다.
황 셰프는 식재료의 근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산지 생산자나 공급자들과의 관계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어가다 보면, 더 좋은 재료가 오고, 그 재료는 결국 요리의 맛에 스며들어요.”
그래서 엘쁠라또의 메뉴는 ‘무엇을 쓸 것인가’의 고민 이전에,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의 고민에서 시작된다.
엘쁠라또의 진가는 메뉴의 고정성보다 유연성에서 드러난다. 셰프는 빠에야처럼 고전적인 조리법을 유지하면서도, 계절이나 산지의 상황에 따라 구성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조금씩 나아지는 하루하루’라는 말처럼, 엘쁠라또의 시간은 계절을 기준으로 흐르고, 요리는 그 안에서 진화한다.
손님들이 가장 자주 남기는 말은 ‘잘 먹었습니다’다. 그러나 그 뒤에 덧붙여지는 이야기들이 이곳의 가치를 증명한다.
“이 재료 어디서 나요?”, “이 조리법은 어떻게 된 거예요?”—단순한 식사가 대화로, 기억으로 남는 순간. 셰프는 그럴 때 가장 큰 의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엘쁠라또는 오늘도 서울 양재천에서 ‘보편성과 현재성’이라는 이중주를 연주한다. 그것은 낯선 나라의 요리를 한국의 식재료로 해석하면서도, 시간의 축 위에 묵직하게 자리하는 일이다.
접시 하나에 담긴 요리와, 그 뒤의 관계와, 흐름과, 진심까지. 미식은 결국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고, 엘쁠라또는 그 접시를 지금도 차분히 내놓고 있다.
※ 이 글은 정식 언론사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인스타그램 세련된 미식가
블로그 세련된 미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