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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영이 Nov 04. 2024

[일과 삶, 꿀벌처럼]


   잠시 미루어 두었던 대학 동기의 농원 방문에 나섰다. 한 달 전 약속을 하고 가는데 도착 직전 갑자기 본가에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자동차를 돌려온 적이 있다.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미루다 오늘에야 다시 찾게 되었다.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중소 도시에서 퇴직 후 농원을 꾸려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단다. 미리 알려준 주소로 찾아 가는데 길이 엇나갔다. 문자를 다시 확인하는데 유치원 숲 간판을 이정표 삼아 산길로 오른다. 흔하지 않게 도심지에 물이 흐르는 하천을 끼고 구불구불 비포장 도로는 보물 지도를 떠올리는 신비함마저 다가온다. 아내는 소풍 가는 기분이라며 연거푸 입꼬리가 올라간다.
   자갈이 깔려있는 주차장 옆에는 나란히 소나무 여섯 그루가 어깨를 견주듯 키높이를 서로 맞추고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탄성을 자아내었다. 자동차 소리에 맞춰 철제 대문을 열고 동기 녀석이 앞장서 우리 부부를 큰 웃음으로 맞이한다. 그의 남편도 밭가운데서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와 악수를 나누며 통성명으로 다가갔다.
   농원에는 철제로 농막을 짓고 벌꿀을 생산하며 지낼 수 있는 넉넉한 실내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후덥지근한 바깥 날씨와 달리 냉방 장치가 원활하여 느긋하게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누린다. 퇴직 후 자신의 후반기 삶에서 창조하는 나날을 시작한 지 육 년 째란다. 처음에는 벌 두 통으로 가족의 안전한 먹거리 생산을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실패와 거듭된 도전으로 지금에 이르렀단다. 양봉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양봉 학교를 다녔고 이론과 실제를 접목한 결과 이제는 어지간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단다.
   농원 시설을 둘러보는데 이렇게 많은 벌통은 어릴 때 본 후 두 번째인가 보다. 백 개 넘는 벌통이 줄을 맞춰 자리 잡았다. 벌 통 입구에는 드나드는 곳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벌이 겹겹이 붙어 있다. 사방으로 나는 벌들 때문에 작업하는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에서 바라본다.      초등학교 시절 소를 몰러 다닐 때 풀 숲 땅에 붙어 집을 짓고 사는 땡벌 집을 건드려 얼굴이며 몸통 곳곳에 쏘인 적이 있었다. 벌에 쏘인 몸은 유난히 두드러기가 심하여 알레르기로 고통을 겪은 아픔이 떠오른다.
   작은 벌 떼 사이로 동작 빠르게 큰 몸집은 아랑곳없이 소리개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꿀벌을 움켜쥐고 사라지는 말벌과 한바탕 격전이 벌어진다. 입구 폭이 두 뼘쯤 되는 채집기를 휘둘러 말벌을 망 속으로 몰아넣는 때 아닌 공방전이다. 날쌔게 도망갔다가 벌통에 내려앉고, 허공으로 또다시 사라지기에 채집기 휘두르는 손길이 멈추지 않는다. 예삿일처럼 능숙하게 침입자를 제압한다.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아카시아 벌꿀, 밤 벌꿀, 야생화 벌꿀 세 가지가 생산된다. 꿀을 몇 차례 내리는지에 따라 벌 꿀 가격도 달라진단다. 전국을 누비며 꽃 찾아 벌집 옮기는 일은 유랑극단이 따로 없을듯하다. 낯선 곳 산 자락에서 자연의 선택을 기다리는 시간이 모처럼 휴식의 기회이기도 할 테다.
   벌통 옆으로 단을 달리하여 키위와 블루베리, 무화과가 매달려 수확의 시간을 기다린다. 과실수마다 주인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곳곳에 서려있다. 잎채소는 풀 더미를 헤집고 식탁에 오를 채비를 마쳤다. 농부의 즐거움이 밀려오는 듯하다.
   냉동실에서 꺼낸 어른 손톱 크기의 고동 모양 물체가 식탁 위에 놓인다. 로열 제리란다. 살며시 뚜껑처럼 생긴 꼭지를 벗겨내니 하얀 애벌레가 허리를 웅크린 채 놓여있다. 로열 제리는 꿀벌의 침샘에서 분비되는 젤 형태의 물질로, 크림색이다. 바로 여왕벌의 주요 영양원이란다. 일벌은 꽃가루와 꿀을 섭취하고 로열 제리를 생성한다. 일벌이나 수벌의 유충은 3일간 이것을 섭취한 이후 꿀이나 화분 등으로 먹이가 바뀌지만 여왕벌의 유충은 처음부터 이후 3일간 로열 제리만 먹는단다. 유충 가운데 첫 3일 이후 이어진 3일간 로열 제리를 먹고 자란 녀석이 여왕벌로 성장하게 된단다. 추가 3일간의 먹이에 따라 50일간 사는 일벌이 되느냐, 아니면 5년을 사는 여왕벌이 되는 갈림길이다. 순간의 선택이 하늘과 땅 차이다. 로열 제리 물질은 비타민과 미네랄, 아미노산 등 다양한 영양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건강에 많은 이점을 주고. 면역력 강화와 피로 해소, 피부 건강 개선 등에 도움이 되어 사람들이 찾는다.
   인간의 욕심으로 벌들의 생태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주인장이 내민 낯선 물질에 손길이 선뜻 가지 않는다. 아내는 주저 없이 꼬투리를 해체하여 내 코앞에 내민다. 멈칫멈칫 바라보다가 이내 애벌레를 본다. 눈을 질끈 감고 입에 넣는데 식감이 없다. 입속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제리는 니글니글한 맛이다. 한 개 또 한 개, 연속해서 세 개를 삼킨다. 어떤 맛일까 하는 궁금증을 넘어 욕심이 생겼나 보다.
   농원에 도착하자마자 접대용으로 꺼내놓은 벌집꿀이 녹아내려 그릇 바닥에 고인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한 두 조각을 얼른 씹어 먹었는데 아린 맛에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다. 꿀맛 호사를 누린다. 부부가 내놓은 벌꿀과 농사지은 복숭아 덕분에 뱃살이 늘어나는 걱정은 뒤로 하고 허리띠를 풀어놓는다. 양봉의 어려움과 채집한 꿀의 판매까지 쉬운 것이 없단다.
   며칠 전 느닷없이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상표 제작에 쓰일 문구 청탁이었다. 붓글씨로 상표명 쓰는 사건이 서로에게 인연을 이어 가는 일이 되었다. 취미로 시작한 서예가 어느 날 대학 동기의 영업 상표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지나고 보면 좀 더 신중하게 정성을 들여 만들었으면 하는 스스로의 아쉬움을 가진다. 아내는 이미지와 글씨가 조화롭다며 분위기를 잡는다. 인쇄소에서는 요즘 저작권이 문제가 되는 일이 많기에 선뜻 문구를 확정 짓지 않아 나에게 부탁을 하게 되었단다.
   낮의 기온이 내려갈 때쯤 농원을 나서는데 부부의 땀이 서려 얻은 야생화 꿀 한 병을 건네는데 원액을 내리지 않았다며 부유물 걱정을 하는 친절함까지 지녔다. 동기 남편이 화분에 심긴 수년 자란 블루베리 한 그루까지 덤으로 내놓는다. 뿌리내려 잘 키워 열매를 얻게 되면 보답하겠노라 큰소리를 쳐본다. 길을 나서 숲 기운을 내려두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자주 가는 곳이라며 경치 구경도 할 겸 확인을 하는데 단골 집에는 자리가 없다. 근처로 이동해 오리 고기로 저녁을 먹는다. 부부가 처음 함께 한 자리였지만 서로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이었다. 가볍게 술 한 잔이 흥을 높인다.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시간이 아쉬울 뿐이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 100세 시대라 말하는 요즘 자신의 인생을 창의적으로 펼쳐 나가는 동기 부부의 삶이 개척자적 모습으로 다가온다. 일터가 있고 그 결과로 경제적 가치를 높이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하였기에 부족한 것이 없지 않은가. 일과 삶, 즐거움이 함께하는 인생 후반전을 기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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