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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by 우영이

이리저리 뒤척이다 몸을 일으켜 이부자리를 접고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본다. 창밖 희미한 기운에 이끌려 주저함 없이 집을 나선다. 등산화에 모자까지 챙겨 아파트 진입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수십 미터 길 양쪽으로 늘어선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사람들의 편리에 따라 팔이 잘리고 목이 묶어져 주체할 수 없는 기운은 옆구리에 새 순이 셀 수 없이 터져 나왔다.

큰 도로를 건너 산길로 접어드는데 오솔길은 경사가 커지면서 집 주변만 걸어 다닌 고통을 맛본다. 무릎 관절에 신호가 온다. 묵직한 당김이 노쇠해지는 몸을 체감한다. 전날 내린 비에 길바닥은 촉촉이 젖어 걷기에는 그만이다. 발자국을 남기는 대신 먼지 없는 길을 걷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어느새 갈림길에 다다랐다. 왼쪽으로 난 길은 조계종 서림사요 맞은편은 부처님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는 법륜사로 향하는 둘레길이다. 얼마 전 구청에서 등산로를 조성하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곧장 오르는 길이 오늘의 목적지인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길 옆에 자란 풀이 키를 높여가고 늘어선 소나무는 둘레를 채운다.

오늘은 날씨가 멀리 시야를 넓히는 기쁨을 허용하지 않는다. 피어오르는 안개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야트막한 길 따라 산딸기가 여기저기 빼곡히 자리 잡았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을 안겨 주었던 지난날을 떠올린다. 수년을 오르내린 길이지만 오늘따라 호젓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 산은 무한하게 베풀어준다.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고 차별하지도 않는다. 다툼도 멀리하고 작은 여유를 줄 뿐이다.

산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어느 누구도 내려오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 정상 밑자락 체육장 근처에 이르자 나무 막대기로 타이어를 내리치는 소리와 내뱉는 기합 소리가 귀에 익숙하다. 체육장에는 여러 기구들이 많은데 비어있는 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배드민턴장에 활기찬 응원 소리가 높아진다. 사람들 틈에 슬며시 끼어들어 팔 운동을 시작으로 기구를 옮겨 가며 산에서 평상시 하는 대로 운동을 한다. 황톳길에는 물을 가득 머금어 묵직한 발자국이 깊게 패어 있다. 유행처럼 만드는 황톳길과는 달리 자연 그대로 길이다. 구간에 굵다란 동아줄을 이어 폭을 나타내는 장식만 있다. 숲길을 걸으면서 맨발 걷기의 효능을 충족시키는 자연 황토 조성길이다.

등산로 전체를 갈래 별로 색깔을 달리한다. 한눈에 알 수 있게 펼쳐 놓은 안내판을 맞은편에 두었다. 수돗가에는 황톳길을 걷고 발을 씻는 어르신들이 만족한 듯 미소로 뒷정리를 하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세상에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과 쓸모없는 이’가 있는데 당신은 꼭 필요하다며 서로에게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발 씻는 주변을 빗자루를 준비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관리해 주는 모습이 남다르다는 내용이다. 자기 집이 아닌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장소를 대가 없이 정리 정돈하는 모습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덩달아 박수를 보낸다.

하늘 걷기를 마치고 옆 기구로 이동을 하는데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키가 내 어깨쯤에 오는 듯한 여자분이 나에게 운동 기구의 줄이 올려져 있으니 아래로 내려 달라고 한다. 그 말에 무심히 내뱉은 말이 “저 옆에도 같은 운동 기구가 있는데요”라고 하였더니 그가 하는 말이 이 기구가 편해서 쓰고 싶단다. 줄을 당겨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내려 주고 돌아서면서 스스로 행동을 돌아본다. 다른 사람이 내 도움이 필요하여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네’ 하면서 운동 열심히 하십니다 하거나, 그냥 아무 말없이 줄을 내려 주었으면 좋았을 걸 왜 그런 반응을 했을까 곱씹는다.

살아가면서 여유가 없다. 세월이 흐르고 어른으로서 나이가 들수록 작은 일에도 화냄이 없이 너그럽게 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자식이 결혼을 하고 손주도 얻은 몸이다. 머리로는 인식하지만 행동으로 임하지 못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행해야 할 몇 가지 중 하나를 뒤로 미룬다. 알기만 하면 무엇하리 실천이 필요하지 않은가.

얼마 전 떠나보낸 어머니의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다. 표현하고 싶고 도움 받지 못한 일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먹는 것과 말하는 것이 불편해 운명하는 날까지 주고받은 말이 따로 기억에 없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자식에게 어떤 말을 전하려 하였을까. 산을 내려오는데 올라오는 이들을 만난다. 혼자 그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발걸음이 가볍다.

안개 자욱한 산을 내려오는데 무릎이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산을 오를 때의 통증은 사라지고 콧노래까지 분출될 정도다. 산은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게으른 하루하루를 일찍 잠에서 깨운다. 남의 불편함을 돌아보는 내가 되어야겠다. 혼자 편한 세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멀리 그리고 오래가려면 함께 하라고 했던가. 귀 기울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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