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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야기]

by 우영이

아침 햇살이 따갑게 다가온다. 성짓골, 땅골, 각닥골, 말고창, 분둣골, 기암남지. 요일마다 소를 몰고 풀 먹이러 찾아가는 골짜기다. 초등학교 시절 등교 전 아침 소몰이는 잠과 싸움을 벌인다. 부모님의 굵다란 기상 소리에 억지 눈을 뜬다.

학교 수업을 마친 뒤 집에 돌아와 맞이하는 소몰이는 일상이다. 오십 여 가구가 모여 사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이다. 농사일에 필수적인 소는 재산 목록 최우선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 소를 이끌고 모여든 할머니와 아이들은 스무 명 남짓이다.


마을이 두 팔 벌리면 등성이에 닿고, 긴 대나무를 산봉우리 끝에 가로로 얹어도 될 정도로 산으로 둘러싸였다. 덕분에 정해진 요일에 맞춰 골짜기로 소를 몬다. 개울 건너 논길을 따라 저수지에 이른다. 집결지다. 이곳을 지나면 각각의 골짜기로 이어지는 갈림길이다. 저수지 둑에 도착한 아이들은 개구리를 잡고 물 수제비를 뜬 막간의 작은 놀이다.

소 치는 이들이 모이면 정해진 골짜기로 오른다. 소 한 마리를 모는 일은 쉽다. 송아지 두세 마리를 치는 아이 중에는 몸집이 작아 머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솔길을 따라 이십 여 분을 오르면 그때부터는 산 전체가 놀이터다. 소들은 소대로 풀을 뜯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놀이 삼매경이다.

햇빛이 강한 여름철에는 잎이 넓은 가지를 꺾어 움집을 짓는다. 움집은 좋은 그늘을 만들어준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잠깐 피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움집에 쓰인 나무는 메말라 땔감의 원료로 쓰인다. 돌판으로 솥을 걸어 옥수수와 밀을 꺾어와 찐다. 먹는 재미에 빠져 소몰이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가 질 무렵 각자의 소를 찾아 나선다. 요놈들도 몰래 남의 농작물에 들어가 이파리를 파헤쳤다. 뒤늦게 밭주인이 달려와 호통을 친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빠른 줄행랑에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즐거움과 두려움이었다. 개울에서 벌이는 작은 돌 밑 가재잡이는 또 다른 놀잇감이다.

이제는 먼 이야기, 이틀이 멀다 하고 오르내리던 골짜기 산길은 잡목으로 뒤덮였다. 길은 흔적을 찾기 어렵고 옛 기억만이 동무들과 끄집어낸다. 이따금 지난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뛰놀던 발자취를 더듬어 한번쯤 산마루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이야기인가.


지난날 친구들의 순수함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세월은 무던히 흘러 소 치던 골짜기 따라 고속도로 개통을 서두르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어린 시절을 물리쳤다. 정착지가 어딘지 모르게 골짜기와 등성이를 오르내리던 그들의 기개는 점점 시야에서 사라진다.


소는 사료로 키워지고 일은 농기계가 대신한다. 어느새 소를 모는 아이들도 없다. 이적이 뜸하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시조만 읊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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