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옷매무새를 거울에 비춰본다. 거실에 널브러진 베개 마냥 이리저리 뒹구는 몸통을 일으킨다. 오늘 하루는 어떤 모습으로 채워질지 떠올리며 아이들을 만나러 출발한다. 학교까지 이르는 길은 교차로 곳곳에 차가 주차장을 이루고 서 있다. 여유로운 마음도 잠깐 어느 듯 목적지를 앞두고 자동차는 속력을 낸다.
퇴직과 동시에 사도 삼촌의 전원생활을 시작하였다. 아내의 오랜 소망을 핑계 삼아 텃밭에 먹거리를 가꾸고 온돌방에는 참나무 장작으로 군불을 지핀다. 따뜻한 기운이 오르면 황토벽의 편백나무 향은 부부의 손끝에서 차곡차곡 마감되었다. 집 정리에 전원생활을 누리는 재미는 뒷전이다. 마당의 잔디를 때맞춰 깎고 서까래 아래 벽면에는 바람을 차단시키는 벽지를 덧붙인다. 마감된 벽면은 푹신한 재질에 결로가 방지된 듯한 느낌이다.
교외에 자리한 곳에 인연이 닿아 주 2회 출강을 한다. 전공도 아닌 과목으로 학생들과 만나 지금까지 부차적으로 익혀온 교과목을 아이들에게 불어넣는다. 학습 자료가 인쇄되면 교실에서 수업에 활용된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오늘은 이 이야기로 시작하면 좋겠다고 몰두한다. 준비할 때의 기분은 어깨춤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하루하루 기대 속에 강의실로 향한다.
지난 삼십 년의 경험이 나를 이끌어준다. 현장에서 한 발 물러난 제삼자의 처지에서 수요자와 공급자의 입장을 떠올린다. 시대는 바뀌었다. 예전처럼 강요된 일방적인 전달은 빗장에 간직해야 할 유물로 여겨진다. 신세대의 요구와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뒤처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과 사무실에서는 몇십 년 후배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각자의 교육 경험과 이론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이가 기안문 작성에 나의 생각을 묻는다. 오랜 경험은 지식을 넘어 지혜로 다가온다. 짧은 시간에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작은 도움에 고마움을 표하는 후배의 얼굴을 대하면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인식한다. 교과목 외에 제2외국어 한 문장은 교실 분위기를 북돋운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이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인사말은 높낮이는 서툴러도 전달한 효과만큼은 확실하게 다가온다.
학기 마지막 시험이 끝난 뒤여서 강의 내용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기본 학습 자료는 인쇄물로 나가지만 강의는 역사적 인물들이 오르내린다. 우리나라를 넘어 중국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이들의 작품이 대상이 된다. 시작은 24 절기가 좋은 이야기의 첫 마당을 채운다. 어쩌면 우리 생활에 깊숙이 자리한 정서를 떨쳐버릴 수 없지 않은가. 여기저기서 가끔 듣는 용어이기에 오히려 친숙하다고 할까.
봄에 시작한 일이 겨울에 이른다. 이제 학년 마무리와 함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이 보인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재미를 가질 수 있고 관심이 주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이 따라다녔다. 내용 전달과 동시에 이야기가 이어져 그날그날의 기억을 유지토록 하였다.
강의 후 연구실에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부드럽게 해 준다. 이때 나타난 한 학생이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바구니에서 비닐에 담긴 한 뭉치의 물건을 건넨다. 고맙다는 말을 마치고 접착된 입구를 뜯어 내용물을 살핀다. 주스 하나와 비스킷 그리고 종이 한 장이 접혀 있다. 펼쳐진 종이에는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씨가 한눈에 들어온다.
삼월 강의실에서 처음 교과 담당으로 만나 어색한 가운데 시간이 갈수록 가깝게 느껴졌단다. 종이 바탕에는 여러 가지 이모티콘이 자리하였다. 빼곡하게 채워진 문장에는 학생의 정성이 보인다.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어느 곳이든 미소로 다가오는 모습과 학생들의 입장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내 덕분에 나의 강의 시간이 기다려진다는 표현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거리에 다닐 때마다 접하는 새로운 간판의 문자는 참다운 지식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어준단다. 이번 일은 자신이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 앞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어른으로 성숙해 가기를 바라본다. 상급 학교 진학을 앞두고 지금의 시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높여 가는 밑거름이 되기를 응원의 박수가 보태어진다.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에게는 올바른 방향을 안내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퇴직과 동시에 멀어질 것만 같았던 가르치는 일이 현재까지 이어진다. 나의 경력과 경험이 다음 세대에게 전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웃고 같은 공간에 있다는 자체가 즐거움으로 밀려온다. 벌써 다음 강의 시간이 기다려진다. 자신이 선생님을 하루라도 빨리 만날 수 있었더라면 라는 말이 오래도록 다가온다. 한편으로는 마지막 수업이 가까워지는 일이 아쉽다.
남은 일정을 빈 페이지에 채운다. 나를 따르는 아이들에게 학습이 기다려지는 시간으로 만들어 갈 준비를 한다. 자료와 지식이 모아진다. 한 시간이라도 가볍게 넘길 수가 있으랴.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즐겁다. 잘하는 일이 좋아하고 즐거우니 대만족이다. 은퇴 후 중년의 삶 속에 지금까지 하던 일을 지속해 나가는 기쁨이 또한 즐거움이다. 스스로 모자라는 부분을 메워나간다. 책과 요즘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운데 느끼는 감정이다.
얘들아, 너희들을 만나 행복하단다. 매일의 출근 길이 기대된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발걸음에 팔을 휘저어 속도를 낸다. 두 개 층을 오르내리는 힘은 남아 있다. 오늘도 가벼운 옷차림으로 강의실에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