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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뭉치]

by 우영이

겨울이 가기 전에 시간과 정성이 깃든 꾸러미를 받았다. 가을걷이에 맞춰 들인 노란 콩 두 자루를 뒷 베란다에 옮겨 두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미루고 미루다 작은 자루 하나를 풀었다.


봄이 다가오는 듯 흩뿌리는 비 소식과 함께 활짝 핀 동백은 꽃송이가 미리 떠나는 인사를 나누지도 못하고 바닥에 뒹군다. 뭉툭한 꽃송이가 비바람에 떨어져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길바닥에 엎드려 서성인다. 또 다른 동백나무는 봉오리를 하나 둘 머금어 아직은 입 속을 보여 주기가 부끄러운가 보다.


넓적한 대야에 노란 콩 한 되를 물이 잠기도록 붓고 이틀 정도 충분히 불린다. 반질반질한 콩이 물을 머금어 두 배 정도 크기로 바뀌었다. 불린 콩이 무슨 용도로 쓰일지 알 수 없다. 햇볕이 산 등성이에 가려져 그림자처럼 사방이 검은빛이다.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본다. 두 차례 콩 가는 일을 마치고 갈아 놓은 콩 물은 찌꺼기를 걸러내었다. 건더기는 계란과 섞어 부침개로 식탁에 올려졌다. 콩 물은 솥에 올린다. 불 세기를 조정하면서 끓어 넘치지 않게 휘휘 저어가며 시간을 들인다. 차가운 물을 부어가며 솥단지 콩 물을 아기 다루듯 조심조심 다룬다. 드디어 끓이기를 마치고 아내만의 비법으로 만든 간수를 부어 몽글몽글 부드러운 작품을 만든다.


뭉쳐지는 알갱이를 한 그릇 담아 숟가락으로 떠서 입으로 가져간다. 고소하고 말랑말랑한 수제 순두부다. 집에서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어느 집이나 맛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마움을 표한다. 두 그릇을 퍼내고 나머지는 무명천을 깔아놓은 바구니에 담아 물이 빠지도록 밑을 고정한다. 바구니에 받쳐 놓은 천에 매듭을 만들고 작은 나무토막을 올린 다음 무게가 있는 쇠붙이를 지그시 누른다. 물방울의 흐름이 차츰 느려지고 떨어지는 크기도 줄어든다. 두 시간이 지날 즈음 쇠뭉치를 내려놓고, 무명천을 벗겨낸 다음 부엌칼로 두부 덩어리를 자른다. 손위에 백일이 다가오는 아가의 살갗처럼 하얗고 탱글 탱글한 두부를 올려놓는데, 그 향과 맛은 지금까지 여느 매장에서 사 온 것과 비교될 바가 아니다.


보들보들하고 몽글몽글한 순두부 한 숟갈을 입에 넣을 때마다 쉽게 삼키지 못한다. 시간을 쪼개어 몇 가지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비지, 순두부, 두부까지 반찬 재료가 생겼다. 김장 김치를 손가락 한마디 넓이로 잘라 비지찌개를 만든다. 따로 발효를 시키지 않아도 먹음직스럽다. 넉넉한 순두부는 씹는 여유가 있다. 물기를 제거하고 네모 모양의 모 두부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게 되었다.


맷돌을 돌려 콩 물을 갈고 가마솥에서 장작불 피워 만들어 먹던 전통의 맛을 흉내 낸다. 비록 손으로 돌리는 맷돌 대신 기계의 힘을 빌어 일손을 덜었다. 시골 마당에서 마련하던 최고의 식물성 단백질을 얻으려 공을 들였다. 아내의 손에 물을 묻히는 일을 몇 차례 반복 되었을까.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여러 손을 필요로 한다. 만들어 놓은 두부가 우리 입속에 들어가는 일은 순간이다.


노란 콩 또는 흰 콩이라 부르는 대두는, 신경이 날카롭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 콩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마음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고, 쥐눈이 콩에는 항암 효과와 심장병 예방 효과, 피부 노화를 억제한다고 한다. 콩은 익혀 먹으면 65%가량 소화 흡수가 되는데, 두부는 95%, 된장은 80% 정도 소화 흡수가 된다니 노력에 따라 완전식품이 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장을 담그는 솜씨가 뛰어났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고구려인은 장 담그고 빚는 솜씨가 훌륭하다고 적혀 있다. 메주가 문헌에 처음 나온 것은 「삼국사기」인데 신문왕 3년에 왕이 김흥운의 딸을 왕비로 삼을 때 보낸 예물 중 메주를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중국 명나라에 두부 사절단을 세 차례 파견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의 두부 만드는 기술이 중국보다 앞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콩은 항암 효과가 널리 알려져 있는 식품으로, 브라질에서는 검은콩으로 만든 페이조아 Feiloada라는 음식은 원래 노예들의 일상 음식이었으나 최근 콩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세계 장수 지역의 대부분은 장수 비법으로 발효된 음식을 즐겨 먹는데 콩류는 빠지지 않는다. 콩은 세계적인 식품으로 천 가지 정도의 용도로 쓰이고 있단다. 최고의 식물성 단백질로 골밀도 증강과 혈관 보호 효과가 있어,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여름에는 콩물, 겨울에는 두부, 그리고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의 장류醬類가 대표적이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먹는 재미가 생겼다. 콩을 물에 불리고 콩 찌꺼기를 걸러내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가족들이 먹는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오랜 기다림의 기간을 뒤로하고 만들어지는 부드러운 식감의 순두부, 두고두고 보관해서 먹을 수 있는 모 두부와 콩 물을 뺀 비지까지 버려지는 것이 없다. 얼마 전 두유를 만들어 먹는 기계를 구입한 뒤부터 30분 정도의 준비로 건강식을 수시로 누리고 있다. 아내의 수고로움이 따른다.

가족을 위해 아낌없이 정성을 쏟는 모습에 고마움을 표한다. 차려진 음식을 즐겁게 먹어 주고, 솥단지 콩 물이 넘치지 않게 휘젓는 정도는 곁가지에 불과하지만 함께 할 수 있어 미소를 머금게 한다. 다만,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에게 맛볼 기회를 만들어 주지 못해 마음이 쓰인다. 올 해는 직접 콩 씨를 심어 가꾸어 한 알 한 알 수확하는 농부의 깊은 마음도 텃밭에서 체험해 볼 것이다. 이 모든 결과와 과정을 동시에 지켜보리라.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다. 어느 하나를 건너뛰고 줄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한 순서에 맞추어 완성해 나갈 때 그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편한 것을 찾기보다 건강한 먹거리를 찾아가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최우선일 수밖에 없다. 일상에서 알찬 모습을 만들어 가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하얀 알갱이가 목화솜처럼 뭉쳐있는 순두부를 한입 맛본다.


농사는 하늘이 도와야 한다고 했던가. 새롭게 도전하는 초보 농사꾼에게 시련이 아닌 희망의 나날을 안겨 주소서. 입자의 틈이 보이지 않는 두부를 삼키는 포만감이 다가온다. 겉과 속이 한결같은 나만의 재미를 채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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