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짐 끝에 비로소 시작된 삶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없다.”
언젠가 이 문장을 만난 뒤로 나는 내 삶에 더 깊게 체념했다.
도망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고,
그 끝에는 평안이 없다고 믿었다.
살아온 삶에 대한 선택은 최선이었고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걸어온 길을 의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성숙함이라고 여겼다.
남편과 나는 우리가 선택한 삶에 최선을 다했다.
청춘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진심이었다.
한 방향만 바라보며 살아왔던 우리는 어쩌면 많이 순진했는지도 모르겠다.
믿었던 것들이 서서히 변질되고 말과 행동이 어긋나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있는 대로 흔들렸다.
진심이었기에 그동안의 모든 수고를 내려놓기까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야 했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었고 오래 고민하고 번뇌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익숙했던 말들이 더 이상 마음에 닿지 않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이미 많이 무너져 있었다는 걸.
깊은 터널 지나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었다.
그렇게 2024년 3월,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때 우리 가족에게는 단돈 50만 원도 없었다.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일하며 늘 생활이 빠듯했고,
떠날 때 가진 것은 거의 없었다.
현실은 막막했지만 마음은 더 이상 그곳에서의 삶을 버틸 수 없었다.
“이렇게 더는 살 수 없다.”
그 생각 하나로 나왔다.
지방의 좁은 마을에서 그저 “일단 떠나자”는 마음뿐이었다.
근처 소도시 위주로 집을 보러 다니며 깨끗한 집을 하나 찾아 가계약까지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 한마디에 그동안 눌러왔던 마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사정, 생활의 어려움, 앞으로의 두려움까지.
말하지 않아도 동생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언니, 이번 기회에 우리 좀 가까이 지내자.
당분간 우리 집에 와서 지내면서 새 집도 찾고 일도 알아봐. 시골보단 도시가 낫잖아.”
그 말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결혼한 지 2년밖에 안 된 동생 부부가 기꺼이 다섯 식구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가계약금은 아깝지 않았다.
새 삶으로 들어가기 위한 작은 통행료 같았다.
우리가 가진 건 옷 몇 벌과 이불뿐이었다.
청춘을 다 바쳤는데 남은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이런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홀가분하게 다시 시작해도 되겠구나.’
2주 동안 동생 집에서 지내며 몸도 마음도 오랜만에 쉼을 얻었다.
맛있는 걸 먹고, 이야기하고, 웃었다.
아이들 학교를 빨리 전학시켜야 해서 학교 근처 원룸을 알아보고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이었지만 누구도 투덜대지 않았다.
우리는 “같이 있어서 행복하다”며 웃었다.
그때 깨달았다.
그동안 많은 것들을 위해 바쁘게 살았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가족에게 마음을 내주지 못했다는 걸.
큰아이가 물었다.
“엄마, 이제 아빠는 그 일을 안 해요?”
나는 잠시 멈췄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동안 아빠랑 엄마는 다른 것들을 먼저 챙기며 살았는데,
이제는 너희를 먼저 생각하며 살고 싶어.”
그날 이후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새로운 일을 찾았고
나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물질적으로는 여전히 넉넉하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전보다 훨씬 풍요로웠다.
아이들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고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모든 걸 잃은 줄 알았던 그 봄, 사실은 다시 ‘우리’를 찾은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무너짐의 끝에서야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된다는 걸.
이제는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도,
누군가의 기대를 채워야 한다는 부담도 조금씩 내려놓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잘 버텼어. 그 용기가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어.”
2024년 봄, 우리 가족은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2025년 겨울 지금,
나는 이 이야기를 쓸 용기를 얻었다.
앞으로 천천히, 도망이 아닌 선택으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기록해 나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