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어느날
캐나다의 겨울은 인내의 계절이다. 11월에 시작된 눈은 해를 넘겨 3월이 되어도 녹을 기미가 없고 온 세상은 거대한 '겨울왕국' 속에 꼼짝달싹 못하게 얼어붙는다.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날씨에도 아이들의 야외 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매일 아이들이 스스로 스노우 슈트(snowsuits)를 입는 걸 돕고 장비를 챙기다 보면 에너지가 금세 바닥나곤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 반 J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난제가 하나 있었다. 아무리 추워도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는다는 것.
두툼한 벙어리장갑을 어렵게 끼워 줘도 J는 1초 만에 질색하며 벗어던졌다. 장갑을 거부한 채 J가 몰입하는 일은 눈 덮인 시소에 앉아 작은 물고기 피규어를 손끝으로 섬세하게 흔드는 것뿐이다. 아이에게 장갑은 추위를 막아주는 고마운 도구가 아니라 손끝으로 세상을 탐색하는 예리한 감각을 가로막는 무디고 답답한 장벽이었으리라.
입김보다 실질적인 지혜가 필요할 때
맨손으로 차가운 플라스틱 물고기를 흔드는 J를 보고 있으면 내 마음까지 시렸다. 아이도 손이 시린지 간간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때마다 입김을 후후 불어 주며 장갑을 권해 보지만 소용없었다.
사실 킨더반 아이들은 활동량이 많아 장갑이 금세 벗겨지기 일쑤다. 그래서 손목 위에 테이프를 한 바퀴 감아 고정하는 경우도 흔하다. J에게도 시도해 봤지만 자폐 아동 특성상 자신만의 루틴과 환경이 유지되어야 안정을 느끼는 '동일성 유지'에 대한 욕구가 강했고 특정 촉감에 극도로 예민했다. 결국 아이는 이물감을 견디지 못하고 테이프를 물어뜯어 버렸다.
나는 현장의 베테랑 유아교육사 아니엘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녀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고도 결정적이었다.
“라라, 성인용 리딩 삭스(Reading Socks)를 손에 씌워 봐!”
리딩 삭스, 손가락의 자유를 지켜주는 작은 지혜
리딩 삭스는 원래 겨울철 실내에서 책을 읽을 때 신는 도톰한 양말이다. 겉은 포근한 니트, 안쪽은 부드러운 플리스로 되어 있어 보온성과 촉감이 일품이다.
성인용이라 아이의 손이 넉넉하게 들어갔고 무엇보다 양말 속 공간이 넓어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J는 양말 속에서 물고기 피규어를 조물락거리며 자신만의 감각 놀이를 이어갔다. 장갑의 뻣뻣한 솔기는 질색하던 아이였지만 구름처럼 보들보들한 양말 안감은 기분 좋게 손을 감싸 안아 준 모양이다. 목이 긴 양말을 재킷 소매 위로 깊숙이 덮어 주니 테이프 없이도 훌륭한 '특수 방한 장갑'이 되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 작은 교집합
물론 현실은 여전히 매일이 도전이다. 어떤 날은 여전히 양말을 내던지고 맨손으로 버티기도 한다. 하지만 유독 찬바람이 매서운 날이면 J는 슬그머니 내 곁으로 다가와 리딩 삭스를 내민다.
직접 말하진 않아도 큼지막한 양말을 쓱 내미는 그 작은 손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추위라는 현실과 자신의 감각적 선호 사이에서 아이 나름의 최선책을 찾아낸 것이다. 스스로 타협점을 제시할 만큼 성장한 아이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몽글하게 피어오르는 대견함을 느낀다.
아이의 돌발 행동 뒤에 숨은 욕구를 읽어내고 존중하는 것 그리고 차가운 현실과 따뜻한 배려 사이에서 실질적인 접점을 찾아내는 것. 정답 없는 교실에서 J와 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이 과정이야말로 교육 현장에서 우리가 매일 써 내려가는 가장 뜨거운 기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