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분명하게 세상과 연결되는 법
3년 전 봄방학이 끝난 직후 나는 유치부(Kindergarten) 아이 ‘J’를 전담하는 특수교육 보조교사(EA)로 배정되었다.
첫 만남의 J는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 온몸으로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였다. 아직 말이 트이지 않은 J에게 교실은 출구 없는 미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화가 나거나 마음이 답답해지면 J는 누군가를 때리거나 바닥을 뒹굴며 울었다. 때로는 교실 밖으로 무작정 뛰쳐나가는 것이 J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 방식이었다.
J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PECS(Picture Exchange Communication System, 그림교환 의사소통체계)를 시작했다.
1년, 바닥의 카드들을 줍던 시간
PECS란 말 그대로 ‘말’ 대신 ‘그림 카드’로 대화하는 연습이다. 말로 소통이 어려운 아이들이 원하는 물건의 카드를 건네며 “이거 주세요”라고 의사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스낵이나 장난감 카드를 건네는 아주 작은 행동부터 시작한다. 아이가 카드를 주면 즉시 그 물건을 보상으로 제공하며 “카드를 주면 내 마음이 전달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훈련이다.
과정은 느렸지만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현실은 매 순간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날이었다. 급한 마음에 원하는 물고기 장난감을 빨리 손에 넣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J는 화를 내며 그림 카드를 갈갈이 구겨버리거나 던져버렸다. 카드 가방을 내동댕이치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J를 뒤쫓아가며 나는 바닥에 흩어진 카드를 줍고 또다시 내밀었다.
카드를 고르고 상대와 눈을 맞추고 짧은 단어를 말하기까지. 그 1년은 단순히 ‘인내’라는 말로 정리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서로의 좌절을 견디며 막혀 있던 의사소통의 틈을 조금씩 넓혀 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Rainbow Room
오늘 과제를 마친 J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PECS 가방을 급하게 뒤적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카드 한 장 많아야 두 장을 조합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J는 세 장의 카드를 한 번에 내밀며 또렷하게 말했다. “Rainbow room.”
세 단어 조합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문장이겠지만 나에게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 막막한 숙제의 끝이 비로소 선명해지는 신호였다.
물론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J는 여전히 감정이 올라오면 소리를 지르거나 몸 반응이 먼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물건을 내던지거나 옷을 벗어던진 채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행동은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PECS 가방에 먼저 손이 간다.
자신의 요구를 ‘문장’으로 만들어 건넨 그 짧은 순간, 지난 1년의 반복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의 안식처, 레인보우 룸
레인보우 룸(Rainbow Room)은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이 감각을 조절하고 휴식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다. 시끄러운 교실 소음에 지치거나 감각이 예민해져 마음을 가라앉혀야 할 때(Calm down) 혹은 몸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는 휴식(Body Break)이 필요할 때 찾는 소중한 공간이다.
은은한 조명 아래 보드게임과 빈백, 트램펄린이 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에그 체어와 감각 인형(sensory toys)들이 놓여 있다. 무거운 담요(weighted blanket)로 몸을 지그시 눌러 안정을 찾기도 하고 낮은 채도의 조명 아래 물고기 어항을 보며 멍하니 숨을 고르기도 하는 아이들의 안전한 쉼터 같은 공간이다.
그래, 가자! 레인보우 룸
내 말이 끝나자마자 J는 PECS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앞장섰다. 예전처럼 손을 잡아끌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J가 먼저 복도를 향해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업무를 마쳤다는 안도감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한 아이가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시간. EA로서 느낄 수 있는 분명한 보람이었다.
느리지만 J는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향해.
*바닥에 흩어진 카드를 줍던 시간들이 모여 문장이 되던 그날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아이들의 속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기다려 주는 마음만 있다면 반드시 세상과 연결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