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곤소곤 말하는 L 공주
2학년 교실 속 L은 언제나 ‘경계 없이 꿈꾸는 아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고 화장실도 친구 (washroom buddy)와 손을 잡고 곧잘 다녀온다. 그런 L에게도 매일 넘어야 하는 산이 하나 있으니 제자리에 앉아 선생님의 말을 듣는 일이다.
수업이 시작되면 L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책상 위에 흐느적거리며 눕거나 다리 한쪽을 책상 위로 툭 걸치곤 했다. 어떤 날은 꿈을 꾸듯 교실을 천천히 배회하며 노래를 불렀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Let it go’를 목청껏 부를 때면 L의 에너지는 교실을 가득 채웠다. 선생님의 설명 사이로 불쑥 끼어드는 L의 존재감은 늘 강렬했다.
그래서 L을 위한 자리를 하나 마련했다. 핑크색 쿠션이 폭신하게 깔린 엘사 공주가 그려진 아이용 의자였다. 나는 L을 그 의자로 조심스럽게 안내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L, 공주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선생님을 보는 거야. 우리 L이 예쁘게 꾸민 왕관 종이에 주문을 써서 화이트보드에 걸어둘까? 매일 그 주문을 외우고 이 자리에 앉는 거야.”
신기하게도 의자 하나가 바뀌자 L의 태도도 달라졌다. L은 잠시 의자를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앉았다. 흐느적거리던 몸을 세우고 정말 공주라도 된 것처럼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선생님을 바라보며 꽤 오래 자리를 지켰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몸이 다시 스르르 풀리기도 했다. 그래도 공주가 되기 위해 애쓰는 그 모습이 괜히 기특했다. 가끔 참지 못하고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불쑥 끼어드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며칠 뒤 담임 선생님은 L에게 또 하나의 물건을 건넸다. 텔레마케터의 헤드셋처럼 생긴 장난감 전화기, ‘위스퍼 폰’이었다.
“L, 이건 소곤소곤 이야기할 때만 쓸 수 있는 위스퍼 폰이야. 이걸 쓰려면 목소리를 아주 작게 해야 해.”
L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위스퍼 폰을 받아 들었다. 이제 L의 등교 루틴이 생겼다. 엘사 의자에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며 묻는다.
“Can I use the Whisper Phone?”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다듬으며 수업에 들어가겠다는 신호다. 가끔 목소리가 조금 커질 때면 “위스퍼 폰을 썼으니 이제 소곤소곤 말해야지?” 하고 말해 주면, L은 금세 목소리를 낮춘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함께 자란다. L이 다시 교실을 천천히 걸으며 노래를 부르면 친구들은 짜증을 내기보다 자연스럽게 L을 핑크색 의자로 데려가거나 위스퍼 폰을 건네준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서로의 방식을 조금씩 알아간다.
엘사 의자와 위스퍼 폰 사이에서 L의 목소리는 전보다 한결 부드럽게 교실 안에 머문다. 오늘도 우리 반 엘사 공주는 위스퍼 폰에 대고 친구들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
그 목소리가 교실 안에 오래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