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디자인을 배울 때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시각적으로 유려하게 보이는 것만을 강조하여 가르쳤다. 다른 사이트들을 모방하여 만드는 스킬을 알려줬다.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서 당연하게도 나는 그게 '디자인'인 줄 알았다. (심지어 내 첫 작업물은 유려하지도 않았다.) 어설프게 툴을 다룰 줄 아는 상태에서 나는 구직을 시작했다.
늘 생각하지만,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 조악하기 짝이없는 포트폴리오를 통해 내 내면을 꿰뚫어본 한 회사의 대표님에게 연락이 와 나는 곧바로 한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신입으로 들어간 첫회사의 첫날, 대표님은 이렇게 물어보셨다.
"이 버튼이 여기에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아나요?"
음? 사이트 예쁘게 만들겠다는데 이건 무슨 존재론적 이야기? 그때의 나는 실력은 없고 자존심만 높던 응애였기 때문에 대충 안다고 둘러댔다. (미쳤었다...)
기초없이 올라선 계단의 다음 칸은 없다. 그저 낭떠러지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낭떠러지로 처참히 떨어졌다.
그것이 나와 '진정한 디자인'의 강렬한 첫만남이었다.
디자인을 네이버 사전에서 검색해보면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것' 이라고 정의되어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목적을' 이다.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디자인이란 무언가 심미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잘 모르는 것이 있다. 그 앞에 붙는 전제다. 바로 <목적>
우리가 살면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은 각자의 존재 이유를 지닌 채 태어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키보드는 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컴퓨터가 인지할 수 있도록 옮겨주는 물리적 도구이다. 약을 담고 있는 약봉투, 스타벅스 컵홀더, 모니터에 붙어있는 스티커, 고양이 방석 등...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들)
주변을 한번 천천히 둘러보며 존재 목적이 없는 사물들이 있는지 살펴보라. 모든 물건이 각자의 사명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물건을 이루고 있는 하나하나의 부품들 또한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정말 기능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첫회사의 대표님이 나에게 물어보았던 '버튼의 존재 이유' 또한 디자이너라면 당연히 설명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어디 버튼뿐이겠는가, 디자이너가 웹과 앱과 서비스에 그려넣는 모든 점/선/면은 각자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 체화하여 깨닫는 데에 5년이 걸렸다. 단순히 아는 것과 체화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굉장히 오래 걸렸다. 나는 나를 힘들게 한 그 버튼이 무슨 버튼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만 내 인생을 송두리채 바꿔놓은 버튼인 것만은 확실하다.
자, 이쯤 되면 마법과도 같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군더더기가 없어서 소름끼치도록 좋은 말이다. 디자인 업계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유명한 말이다. 디자인의 정의와 비교해본다면, '형태' = 조형적 실체화 '기능' = 목적 이라고 대입하여 보면 된다.
자 그러면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자.
본인의 디자인의 모든 컴포넌트, 여백, 컬러, 문구 (등등) 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지, 클라이언트와 투자자 혹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지.
안 된다면, 그게 바로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늘 기민하고, 예민한 상태로 공부해야한다. 왜 이 여백을 써야하지? 왜 이 컬러를 써야하지? 왜 이 영역은 input이 아니라 dropbox를 써야하지? 왜? 왜? 왜?
이 '왜'에 대한 대답들은 수많은 학문들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심리학, 물리학, 생물학, 세계사, 역사, 수학, 음악 등... 결국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한다.
'왜'는 정말 좋은 질문이다. 스스로 사유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상으로 좋은 내용을 접하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 영상을 끄고 책을 덮으면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사유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글을 쓸 생각이다. (박웅현님의 책은 도끼다2를 읽어봐도 좋다)
누군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것들은 기획자가 하는 것 아닌가요?"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각 회사마다 디자인의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디자이너고 우리의 존재 이유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멋진 목적을 가진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그 존재 목적에 맞게 조금은 스킬트리를 이쪽으로 열어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디자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를 하나 더 얻게 되고 그 필터들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진다니...
디자인이란 정말 멋진 업인 것 같다.
덧붙이는 글 1.
첫회사의 대표님과는 계속 연이 되어 함께 일하고 있다! 정말 존경스러운 대표님.
해피엔딩.
덧붙이는 글 2.
공개적인 곳에 내 이야기를 적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나를 드러내야할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좋은 팀을 찾고 있고 개인적으로 컨택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드러내야 한다. 노션에 쓰던 일기, 내 사유들과 철학들과 디자인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놓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