立春

by 그리다너

안녕 현아. 나는 지금 기대했던 직장에서 잘리고 책상에 앉아있어. 사실 내 발로 나왔지만 나는 모든 순간이 나가라는 맥락이었어. 네가 떠나간 곳은 어떠니? 우리 같이 삿포로 가기로 했는데. 우리가 하직한 겨울이 커튼을 칠 예정이래. 어두운 커튼 위 쏘아지지 않은 빔을 혼자서 느끼며 엔딩 크레디트를 하나하나 기억할게. 현아 너만은 내가 없는 이 지구에서 내 이름이 쓰일 일기장 한 공간을 마련해 줘. 그럼 나는 볼펜으로 적히는 내 이름 안에 영원히 머물게. 안녕. 나의 현아, 나는 오늘 평행 우주로 떠나.


<입춘>


"그래도 사랑했으니까 결혼하려고 한 거 아니야."

준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닌 질문을 가지고 동의를 구한다. 응. 너의 전 여자친구 얘기 잘 들었어하지 못 하므로 "그랬겠지." 답을 한다. 나의 다섯 번째 연애가 끝나간다.


"이러려고 은이씨 뽑았어요."라고 말하는 상사. "네." 대답을 한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향한다. "이거 쿠키 드세요. 맛있어요." 앞자리 사람이 건넨다. "고마워요." 비닐에 인쇄된 로고. 이 제과점. 밤늦게 같은 쿠기를 사기 위해 들른 어느 날, 주인아주머니가 "언니한테 오늘 뭐 좀 주고 싶네."라며 에그타르트를 건넸다. 그런데 받을 수가 없었다. 카운터에 서 있던 표정. 너무 익숙한 나 자신의 표정. "괜찮아요. 힘들게 장사하시잖아요." 순간 굳어지는 표정에 실수했다 싶었지만 늦었다.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왔다. 늦은 밤 사람들이 들어차 있을 것 같은 건물들을 지나가며 자신이 일상에 지쳤음을 알았다. '모두 버틸 텐데.' 순수한 상대의 호의도 알아차리지 못 할 만큼. 10월이다.


1월의 마지막 주 정규직 전환을 먼저 물어봤지만 거절받았다. 준은 말했다. "네가 잘못해서겠지." 나는 물었다. "아니. 나 말고 단톡방을 만들고. 말했잖아? 그중에 한 명은 일준 뒤 나 야근하는 동안 자신들끼리 밤 11시까지 회식했다니까? 그리고 다음날 와서 필요 없다고 했다니까?" 준과 헤어졌다.


2월 계약직이 끝났다. 나의 현아. 왜 나한테 책갈피를 주었어? 그때 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잖아. 여기는 네가 없다는 점만 달라. 그 우주에서 내 이름은 희였고 여기서는 은이라는 점 거기서는 정규직이었고 여기서는 계약직이라는 점 그건 내게 크게 중요한 점이 아니야. 네가 떠나간 곳은 어떠니? 현아. 너는 왜 이 우주로 안 돌아오고 나는 여기로 보낸 거야? 네가 책갈피를 꽂아 준 모서리가 흠집난 책을 팔던 중고서점엔 이젠 카페가 들어섰어. 사람이 많아. 손때 묻은 책은 더 많은 얘기가 있다고 좋아하는 나의 현. 나는 사실 새 책이 좋아. 완전한 소유 같거든. 나는 말야 돈은 없는데 책은 소유하고 싶을 때 중고서점에 가. 현아 너의 여유가 보고 싶네.


"카드는 앞쪽에 꽂아주시고요." 저 캐셔는 하고 싶어서 할까. 돈 벌려고 할까? 네 지구의 '희'는 이직해서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니? 현아 여기서 네 이름은 '진'이라 했는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 내가 현이라는 인물의 보존을 궁금해하는 것과 같네. 네가 떠나간 이 우주의 진은 너와 닮은 점이 오로지 내가 궁금해하는 등장인물이라는 것? 그것뿐이네.


"은이씨가 어떤 백그라운드를 가졌든지 상관없어요. 태도만 갖고 있으면 돼요." 안 뽑아줄 거라는 걸 아는 회사에서 1시간 넘게 같은 말들을 듣고 나왔다. 면접용 구두에 발뒤꿈치 양쪽이 까져 분홍색이다. 편의점에 가서 반창고를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왜 정장 입고 갔지?' 신발장 거울에 비친 모습에 자기연민이 쌓여간다. 서로 관심이 없다. 관심은 기브 앤 테이크. 현아 거짓말이 어려워. 너는 고개 숙이며 말하겠지. "생존보다는 아니잖아." 다정한 정답을 주던 나의 현아. 3년이 지났어. 여기에 네 일기장이라도 있으면 나의 이름이 서 있을 곳 정도는 있을 텐데.


현의 일기장에 끼워져 있던 책갈피를 홀려서 꺼내 본 날. 현은 커피 한 잔을 내려 내게 건네주고 있었다. "이게 열려있었어?" 당황한 나는 고개를 저어댔다. "아니. 이게 너무 예뻐서." 현이 자신의 일기장을 조용히 덮었다. "안 봤으면 됐어." 책갈피를 쥐고 있는 손을 보며 갑자기 환하게 웃던 현. "가질래?"


"우리 솔직히 평범하잖아. 보자마자 와 소리 안 나오잖아. 이미 하겠다는 사람이 꽉 차있어. 기준을 낮춰야 해." 겨울잠을 끝내라는 사람들. 현아. 동백꽃의 꽃말이 뭔지 너는 혹시 알아?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절기상 봄인 2월. 봄은 항상 제멋대로 왔다.


"이걸로 네가 우주를 건너왔다고?"

"원래 모든 건 작은 틈에서 벌어져."

"이런 게 많아?"

"일상에 작은 틈을 준다면."


현아. 살아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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