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dn't we have fun
그날은 비가 왔어요. 주변은 불타고 있었어요. 딱 내가 걷는 길에만 비가 내렸어요. 이 길 밖에 없어서 이 꼴이 됐는데 불구덩이에서 사람들 형상이 일렁거리며 손가락질했어요. 뛰어보았어요. 길은 끝이 없었고 금세 숨이 차버렸어요. 이젠 지쳤다고 그만 집에 가고 싶다고 마음으로 빌었는데 "다 이뤘다"는 음성만 들리고 세월이 조용하게 흘러버렸어요. 어느새 풍경이 바뀐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내게는 괄호가 많은데 사회에는 검은 테두리 흰 빈칸이 많았어요. 소유한 마음은 시끄럽게 웅성거리며 사회에는 숨 쉴 틈 없이 빈칸이 쌓여가요. 그때 당신을 보았어요. 없는 육체 밖 검은 형태의 일렁임. 그렇지만 난 당신을 사람으로 보았어요. 유일한 온도 같았어요. 당신을 보고서야 날 내려다보았어요. 역시 당연하게 생각했던 채워짐이 없었고 투명한 무색의 형체. 몇 년을 내린 비를 보고 소나기라고 하진 않지만 당신과 함께 있어서 그렇게 불러도 될 것처럼 불밭은 짧게 그친 풍경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무채색 세계에서 건반을 누르는 당신 옆에 앉아있었어요. 모르겠는 음악을 연주하며 당신은 다른 곳에 걷고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난 그 뒤를 당신 옆 의자에 앉아 조용히 따라가요. 당신의 어두움을 한 번 온몸에 뒤집어쓰고 검은 테두리를 갖게 되었어요. 당신은 "유화!"라 말하더니 터져버렸어요. 펑. 바닥에 검은 물들이 떨어져 있어요. 나도 터지려나 손을 내려보며 눈을 감았다 떴는데 다른 곳이었어요. 다행히 터지진 않았어요. 아. 내가 꿈꾸던 알록달록한 꽃밭이 있는 세계에 와 있어요. 여러 꽃잎들과 나비가 몸뚱이를 툭툭 건드리면서 지나가요. 내 몸에 스쳐간 색깔들이 물들어요. 유화로운 삶이군요. 좋아서 눈을 감고 핑그르르 돌다 넘어졌는데 다시 그 빗길. 꽉꽉 채워진 육체엔 상처가 생겼어요. 여전히 비는 싫지만 내게는 당신이 연주하던 멜로디도 있고 여러 색채도 있어요. 이제, 나만 잘하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