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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샬럿 Feb 23. 2017

인간, 비인간이 되기까지

편혜영의 <재와 빨강>

                             

편혜영 작가를 좋아하는 편이 못 되었다. 굳이 가르자면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글엔 될 수 있는 한 호오를 가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임에도 그랬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소설을 접한 지가 벌써 3년 정도 지난 것 같다. 그마저도 이상문학상 수상집으로였고, 단행본으로는 10년 전의 <아오이 가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작가의 글은 소위 취향을 탔고, 안타깝게도 나는 그 배에 승선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는 당시의 나를 질겁하게 했다. 편혜영의 소설 속 도시들은 하나 같이 위태로웠고, 인간은 가장 초라하고 추악한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벗어 던졌다. 가뜩이나 비위도 약한 나는 그 소설들을 견뎌내질 못했다. 꾸역꾸역 읽다가, 인간을 저며 모조리 통조림에 넣어버린 어느 소설에선 책장을 덮고 헛구역질을 했던 것도 같다. 기억이 맞다면, 모든 살이 저민 채 담긴 그 통조림엔 하필 눈알만은 멀쩡했다.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드러내고야 만 동그랗고 핏발 선 안구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눈이 아름다운 건 오직 그를 조금이라도 덮는 살갗이 존재할 때뿐이란 걸 그때 알았다.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그녀의 글은 친절과는 거리가 멀다. 모두를 위한 글이랄 수가 없단 뜻이다. 애초에 대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쓴 소설이라 보기도 힘들다. 죽은 쥐들과 쓰레기와 기괴한 모습으로 죽은 시체들이 널브러진 광경을 담아낸 글이 대중성을 노리고 지어졌다 보기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 세계를 버리지 않는다. 꼬장꼬장하리만치 꼿꼿하게 자기 주관을 지킨다 해야 할까. 세계의 가장 추악한 면모를 향한 그 완고한 외곬의 고집을, <재와 빨강>을 읽고서 다시 느꼈다. 그나마 나이가 들어선지 아니면 소설보다 더 비위 상하는 현실이 내 안에서 축적된 경험인지, 그때보단 한결 수월하게 읽어낼 수 있었던 점이 다르다면 달랐다. 작가의 세계가 많이 유순해진 탓일 수도 있다. 여하간 <아오이 가든>보단 상당히 편하고 <몬순>보단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나로 치면 꽤나 자가당착인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강산이 한 번 변한 뒤에 그녀를 다시 찾은 건, 폴란드에서 <재와 빨강>이 올해의 도서로 선정됐다는 지극히도 단순하고 속물적인 호기심 때문이었다. 



편혜영 소설의 행적을 충실히 좇아온 독자가 아닌지라 섣불리 말하긴 힘들지만, 그녀의 소설은 확실히 바뀌었다. 솔직히 많이 놀랐다. 너무 과격해서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던 그로테스크한 세계관은 차분한 문장을 통해 현실감을 갖췄다. 대책 없이 쏟아내는 통에 어딘지 공격적인 인상마저 주었던 글들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기까지 했다. 덕분에 세계의 부조리를 관통하는 시선은 한층 깊어졌다. 여전히 충격적인 이야기임에도, 이젠 설득이 되었다. 내가 시간에 단련된 덕도 있겠지만, 이 정도 달라진 건 순전히 작가의 노력일 터다. 작가가 자신만의 세계를 이룩한 건 분명해 보인다.


이야기는 여전히 칙칙하다. 쥐를 잘 잡는다는 이유로 C국 본사에 파견된 주인공은 공항 입국 단계에서 전염병 의심환자로 분류된다. 이후 그의 삶은 기이한 소용돌이에 빠진다. 공항의 임시보호소 생활 이후 찾아간 본사에선 그의 파견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 일단 숙소에 머물며 열흘 정도 기다리란 말만 그에게 꽂힐 뿐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캐리어를 통째로 잃어버려, 연락을 받거나 걸 수단도 마땅히 없게 된다. 급한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나와서 본 도시의 모습은 마치 세계의 끝을 보는 듯하다. 상점은 약탈당했고 거리는 쓰레기 더미에 점령당했으며 진물로 악취가 진동한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시체와 쓰레기를 소각하는 통에 시엔 온통 안개가 자욱하며, 소독차가 수시로 다녀가 매콤한 연기에 앞을 보는 것도 힘들다. 기세등등한 전염병의 전파 속도는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끝내 주인공이 묵고 있는 곳까지 의심 환자가 발생했단 소식이 돌자, 호텔은 식당마저 폐쇄한 채 하루 세 끼를 복도에 식량을 넣어주는 방식으로 서로간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택한다. 


여느 때보다 냄새가 지독했다. 내내 쓰레기더미에 누워 있느라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냄새 속에 누워 통증을 참아내는 동안 그 역시 냄새의 일부가 되었다. 세계가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냄새를 풍기는 세계가 된 셈이었다. 그는 이처럼 빠르게 냄새에 동화된 자신을 두둔하는 심정으로 구역질을 삼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빼앗길 게 없으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사내에게 얻어맞은 순간,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에 들어섰음을, 도덕과 질서와 교양과 친절이 정당한 세계에서 약탈과 노략질과 폭력과 쓰레기가 정당한 세계로 진입했음을 깨달았다. (pp.54-55)


감금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가는 사이, 그는 동창인 '유진' 편으로 자신의 전처와 애완견이 잔인하게 피살당한 채 발견됐단 소식을 듣는다. 더군다나 용의자는 그 자신. 사망 추정시각은 그가 출장을 떠난 그날이라는데, 그는 도무지 기억 나는 것이 없다. 그러다 문득 칼을 쥐어본다. 그렇잖아도 손바닥에 진하게 남은 멍 자국이 은연 중에 불안하던 차에, 아주 익숙한 감각이 섬광처럼 스친다. 그때 경찰이 불시에 숙소를 찾아들고, 그는 잡히지 않기 위해 호텔 밖 쓰레기 더미 위로 투신한다. 이후의 삶은 익명의 부랑자로서 인간이길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사건의 연속이다. 그는 쓰레기를 주워먹으며 노숙하고, 전염병에 걸렸단 오해를 받아 소각장에서 태워질 뻔했다. 급기야 하수구 생활까지 하게 된 그. 그러나 극적이게도 일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쥐를 잘 잡아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도시에 버려진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능력 덕에 C국의 방역업체 직원이 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때때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떠올렸다. 전염병으로 무너져가는 도시의 모습이 공통의 인상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그러나 두 소설은 확연히 다르다. <페스트>의 오랑이 아름다운 해변을 낀 따뜻한 휴양지라면, C국의 도시는 쓰레기 매립지를 재설계한 곳이다. 도시는 다른 구역과 외떨어진 곳에 다리를 두고 간신히 연결돼 있으며, 항상 쾨쾨한 공기가 맴도는 곳이라고 일컬어진다. 임시보호소에서 풀려난 주인공을 태운 택시기사가 숙소 구역의 이름을 듣는 순간 머뭇거리는 모습은, 애초에 이 도시가 소설 속에서 어떤 색채를 지닌 곳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평화로운 휴양지 오랑의 전염병은 의외성이 짙지만 이곳의 전염병은 그래서 너무나 제 것 같다. 게다가 더욱 처참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기까지 하다. 오랑이 그나마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곳은 무정부를 넘어 무인류에 가까운 상태다. 보도마저 통제되는 듯하다. C국의 심각성은 타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주인공의 전화를 받는 모국의 이들은 하나 같이 C국의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그가 본사에 파견된 것이 못마땅한 동료 직원들은 그의 상황을 비아냥대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재와 빨강>의 주인공은 살인자다. 굳이 따지자면 정의 쪽에 가까웠던 오랑의 화자와는 시작점이 다르다. 주인공은 총 세 번의 살생을 저지른다. 두 차례는 사람을 대상으로 했고 한 차례는 개였다. 단지 "내가 죽였다"는 말만 하지 않을 뿐, 그는 사실상 전처와 애완견을 살해한 장본인이다. 방역업체 직원이 되고도 그의 살인은 이어졌다. 쥐를 제대로 잡지 않는다며 자신을 추궁하는 의뢰인에게 사과를 하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의도치는 않았다. 그러나 그 살인마저도 주인공은 자수보다 은폐와 도주를 선택한다. 소설을 관통하는 '비인간'의 지점이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건이다. 전처와 애완견을 죽인 사건은 그나마 주인공의 순간적 기억 상실이라는 변명의 여지라도 있다. 그러나 의뢰인에 대한 살인은, 그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더군다나 의뢰인의 목에 주머니칼을 대는 순간 상실이라 여겼던 기억의 단편과 마주하기까지 했다. 극도로 혼란해하면서도, 끝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놀렸다. 그는 그렇게 '인간'으로 돌아올 길을 포기해 버렸다.



그는 다시 '인간'일 수 있을까?


라고, 빈번히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다움'에 대한 고찰이야말로,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많이 맞닥뜨리게 되는 고민일 것이다. 주인공에겐 여러 차례 강압적인 선택지가 주어진다. 선택지가 강압적인 이유는, 주인공을 둘러싼 상황이 주인공의 선택을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주인공의 선택인 듯 외피를 썼지만 독자는 안다. 이 선택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유효하지 않을 것임을. 경찰을 피해 쓰레기 더미로 투신한 최초의 선택부터가 그랬다.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었다. 동창이자 전처의 두 번째 남편인 유진의 말로 미뤄볼 때, 그가 '누명'(이라고, 당시까진 생각했다)을 벗을 확률은 영점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이미 쓰레기들이 충분히 익숙하고, 이 도시의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까지 된 상태다. 그가 과감히 쓰레기로 몸을 던진 이유다. 이후 그의 행적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것들과 완벽히 유리된 모습이다. 그는 내다버린 옷을 입고, 쓰레기를 뒤지며, 곰팡이가 핀 빵으로 끼니를 연명한다. 이전까지의 삶이 지극히도 평범한 현대인의 전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면, '자발적인' 투신 이후의 삶은 현대인은 물론 인간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였다. 즉 '인간'의 영역에서 '비인간'의 영역으로 뛰어든 최초의 발걸음이었다.


주인공의 나날들은 '인간적임'에서 더욱 멀어진다. 먼저 그는 이름을 잃어버린다. 물론 '인간'이었을 때조차, 소설에선 그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에 대한 간접적 언급은 있다. 경찰이 그의 방의 초인종을 누르는 장면에서다. "외국인이라면 정확히 발음할 수 없는 종성의 연속"을 가진 이름이라는 것이, 작가가 주는 작은 단서다. 그러나 끝내 그의 이름은 활자로 드러나지 않는다. 방랑 생활을 하게 된 후엔 더하다. 그는 오직 노숙인들만의 번호로 불린다. 9번이었던가, 그마저도 자리가 바뀌면 그 자리에 따른 번호로 다시 불리는 삶이다. 알튀세르는 오늘날의 인간을 사회로 편입 혹은 강제시키려는 테제가 호명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에겐 사회가 부여하는 인간의 자격이 완전히 상실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매순간 바뀌는 번호 외에는 그를 호명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생활을 할 적 그의 이름이 불리지 않은 게 현대 사회의 익명성을 드러내는 장치였다면, 노숙생활의 그것은 최소한의 인간적 조건에 대한 박탈이나 다름없다.


노숙생활은 비인간적임의 연속이다. 화룡점정은 전염병에 옮은 것으로 의심되는 "2번"을 소각장 불구덩이로 집어넣는 장면이다. 어느 날 2번은 가래 섞인 기침과 발작 증세를 보인다. 상대적으로 말쑥한 8번은 2번이 전염병에 걸렸다는 걸 확신한 후, 다른 '번호'들을 규합해 2번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가장 어린 축이었던 두 명이 2번을 실을 사람으로 뽑히고 ― 거기에 주인공이 포함된다 ―, 다른 이들은 2번을 큰 비닐가방에 재빨리 집어넣는다. 극렬한 저항과 폭력의 과정에서 주인공은 2번에게 팔을 물린다. 치솟아오르는 불길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2번의 비명은 한동안 주인공의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비닐가방에 싸여 소각장으로 투하된다. 인간적인 것들과 가장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이들조차, 닥친 죽음의 공포 앞에선 생물학적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역시나 지극히도 비인간적으로 행해졌다. 인간이기 위해서, 그들은 다시 비인간이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주인공은 하수도 생활을 시작한다. 플롯의 하강은 여기서 정점을 맞는다. 사람이라 불러도 좋을지 망설여질 정도로, 하수도에 사는 이들에겐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은 하수를 흐르는 음식을 주워 먹으며, 그 물에 대고 설사를 한다. 각성과 수면과 배설이 분리되지 않은 그들의 삶은 동물만도 못하다. 인간의 끝도 모자라, 그곳에서 그는 생명체의 최하와도 같은 삶을 산다.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곳에서의 소일거리란 그에겐 오직 쥐 잡기다. 평범한 인간이었을 때 그는 쥐를 경멸했다. 상사의 집안잔치에서 쥐를 잘 잡은 '공로'로 나름대로 고속승진하긴 했지만 그에겐 죽은 쥐의 모습이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다시 쥐를 잡으면 사람이 아니라며 이를 갈던 그였다. 그런 그가 하수도에선 시간을 견디기 위해 쥐를 죽인다. 심지어 쥐를 잡음으로써 그는 생의 최소한의 감각을 유지한다. 하수도 입구에 죽은 쥐가 쌓여가는 모습을 보며, 그래도 자신이 무언가는 하고 있다는 보잘것 없는 위안이자 기만에 젖어드는 것이다.


하강 일면의 플롯은 일대 전환을 맞는다. 하수구의 쥐를 발견한 시 관계자가 그를 한 방역업체에 소개하면서부터다. 땅 밑까지 꺼졌던 생활은 가까스로 지면으로 돋아오른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 그는 노숙생활 시절을 비롯해 이후에도 몇 차례나 본사를 찾아갔지만 번번이 문 앞에서 거절당했다. 회사는 전염병이 도는 밖은 신경도 쓰지 않듯 아무렇지 않게 돌아간다. 그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본주의 시스템만은 공고하리라고 선언이라도 하듯. 가까스로 들어간 사무실에서도 그는 자신을 파견사원으로 선발한 '몰'의 존재를 알아낼 수 없었다. 몰은 전염병 때문에 퇴사에 가까운 병가를 한 상황이다. 그가 그토록 끈질기게 몰을 찾은 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수신인이 없는 메일 한 통으로 전염병이 도는 C국의 본사에까지 오게 됐지만, 그는 끝까지 확인받고 싶었다. 이 회사의 사원이자 아주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작가는 몰을 기어이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주인공의 마지막 '인간적 가능성'에 대한 희망마저 지워버린 셈이다.


“이런, 모르셨군요. 몰은 병가중입니다. … 인수인계요? 그런 게 있다면 병에 걸려도 맘 편히 쉴 텐데요. 친구분이라면서 업무 걱정까지 해주시는군요. 우리는 늘 과중한 개인 업무로 죽을 지경이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해도 일은 계속 쌓여 있어요. 도대체 언제 끝이 날지, 쌓인 서류를 보면 한숨이 나죠. 보세요, 자정이 가까운데 야근자가 이렇게 많잖아요. 아무리 전염병이 돌아도 일을 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아요. 병에 걸리지 않는 게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병 때문에 일을 망치지 않는 거죠. … 게다가 아무리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해도, 당신 같은 방문객이 늘 있어서…… 전염되면 곤란하죠. 그야말로 끝이에요. 어떤 일을 완전히 망칠 수도 있어요. 모든 걸 잃는 거죠. 병에 걸려서가 아니라 더 이상 일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감염자의 일을 자발적으로 인수인계할 사람은 없어요. 감염자가 작업하고 있던 서류는 다 폐기해요. 만져서 볼 수 없으니 서류야말로 무용지물이죠. 감염자의 컴퓨터는 아주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원을 켜지 않죠. 몇 겹의 장갑을 끼고 컴퓨터를 만지면 아무래도 조작이 자연스럽지 못하니까요. 병가중인 담당자의 일은 보류되거나 폐기되었어요.” (pp.201-202)



왜 그였을까?


라고, 소설 말미에 이르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가 C국 본사에 파견된 것이 비단 쥐를 잘 잡는다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어쩌면 그것이 다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아주 은밀하게 내비친다. 본인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 했지만, 그에겐 이상한 부분이 제법 발견된다. 무엇보다 그는 전처를 지나치게 의심하고 지나치게 사랑한다. 무미건조한 어투로 일화를 말하고 있지만, 냉정함을 걷어내면 전형적인 중증 의부증 환자다. 물론 전처 역시 그에게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지 못했음이 객관적 서술로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의심과 망상은 지나치다. 그는 전처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매우 좋아했다. 자기 전, 그녀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의 시간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없는 시간을 견디질 못했다. 혼자가 된 시간을 유영하며, 그는 조금씩 전처와의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가 진심으로 애달파하는 것은 전처의 삶이 아니라 그녀로 인해 외로워진 자신의 삶이었다. 불쑥 찾아든 그런 생각으로 그는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자 결혼생활 내내 방탕하다고 의심받은 아내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었을지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고 전처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사랑 대신 의심만 퍼부은 전처에게 돌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취중에 참지 못하고 전처에게 전화를 걸어 무턱대고 사과했을지도 모르고 실제로 전처를 만나러 가거나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사정했을지도 모른다. 만취 때의 일이 대체로 그렇듯 다음날 아침에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묵직한 숙취와 후회와 난데없는 근육통 ― 간밤에 유진과 싸움이라도 벌인 걸까 생각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 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푸른 멍만 남았다. (p.82)


전처와 헤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둘만의 여행이었다. 필리핀이었던가, 동남아 인근을 다니는 일정이었다. 우연히 듣게 된 원숭이 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돌연 그를 사로잡았다. 현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숭이 사원 일정을 감행한다. 전처에겐 양해도 구하지 않았다. 길은 걸을수록 사라지고 숲은 갈수록 무성해지지만, 그는 만용과도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만 갈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날은 금세 어두워지고 원숭이들의 습격도 본격화된다. 어느 틈엔가 원숭이들은 끝도 없이 몰려와 두 사람을 희롱한다. 모자를 가져가고 썬글라스를 빼앗아 가며 가방을 훔쳐간다. 그는 가방만은 필사적으로 지켜내려 한다. 가방을 나꿔챈 원숭이의 꼬리를 물어뜯고 달려드는 원숭이들을 내동댕이치며 사정 없이 주먹질 한다. 그는 당시 이성을 잃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내를 완전히 떠나게 했다고도 말한다. 전처는 먼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그 길로 둘은 이혼했다. 원숭이 사원은 그의 일련의 행동에 대한 상징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비이성적 혹은 비정상적인 그의 '선택'들이 결코 우연만은 아님을, 이미 그는 그런 선택을 지속적으로 해 왔던 경험이 있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일화에 가깝다.


이쯤되면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최초의 살인으로. 소설 그 어느 곳에도 그가 전처를 죽이게 된 개연성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전처를 죽이기엔 그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미련이 많아 보인다. 전처의 또 다른 남편인 유진을 조용히 증오하곤 있지만, 원래 그 자신이 유진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차였다. 그는 유진을 선택한 전처를 내심 동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전처를 죽인 범인이 맞다. 그렇다고 가정할 때, 뜨악한 질문이 이어진다. 전처와 개는 그가 출국하려 집을 나선 그날 아침에 이미 갈기갈기 찢긴 주검이 돼 있었다. 그걸 어떻게 보지 못한 걸까? 주인공은 바로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마지막까지 답은 나오지 않는다. 전처를 죽인 점을 확실히 인지한 것 자체가 이미 소설의 극후반부이기 때문이다. 방법은 독자가 답을 유추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단서가 빈약하다. 확실한 가능성은 세 가지다. 그의 말이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거나, 그가 비정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거나, 그가 인간의 전형에서 상당히 벗어난 사람이거나.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는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점이다.




편혜영은 우리 안의 비인간성을 드러내는 데 능하다. 작가의 서사는 어느덧 문명과 세계의 비이성을 고발하는 데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한 작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큼 가슴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재와 빨강>을 읽는 시간은 힘겹지 않았다. 그 세계가 사람이 타는 재와 불길이 치솟고 있는 곳이었더라도.


그저 궁금하다. 그의 삶이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지. 그는 모국을 잃었고 사람을 잃었으며 죽음과 죽임에 대한 경계와 자각을 잃었다. 소각장의 재와 새빨간 피로 물든 그의 삶이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인간적'일 수 있을까. 그에겐 오직 '인간'과 더 멀어지는 날들만 남은 것은 아닐까. 차분하지만 여전히 충격적인 글들을 짚으며, 나는 우리 세계에 닥친 수많은 '비인간'의 징조를 생각했다. 우리의 징조들과 소설 속 이야기들 간 차이가 단지 과장된 설정들 뿐이라면, 우리의 세계엔 희망이 있을까. 우리는 충실히 '인간'임을 감내하고 있는 걸까. 이 세계야말로 '인간다운' 것들과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소설은 그 어떤 질문에도 침묵할 뿐이었다.



 

* 이 글은 블로그(http://dearcharlotte.tistory.com/)와 동시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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