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덧셈과 뺄셈의 계절

사랑의 빛과 그림자

by Dear Ciel

길을 걷다 장갑과 모자를 쓴 사람을 보고 문득 시간이 훌쩍 지나갔음을 깨닫는다. 벌써? 하는 생각도 잠시, 15분쯤 지나니 장갑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본다. 햇살은 따스하지만 차가운 공기 속 기운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11월도 다 지나갔다. 12월이 온다.


12월의 저녁은 한 걸음 일찍 달려온다. 이 시간은 분명 태양 아래 움직이고 있었는데, 마지막 달력을 넘기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밤이 가득 차 있다. 연말이 되면 마무리해야 하는 일도, 챙겨야 할 마음도 많아져 하루가 가볍지 않다. 퇴근길, 마주 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우울감을 느낄 때도 있다. 다들 어딘가 목적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집을 향하고 있으면서도 ‘집에 가면 좋겠다.’라는 이중적인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감정은 1월의 짧은 낮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일 년을 밀어내고, 또 짊어지고 갈 묵직한 시간의 무게에 다른 감정에 머무를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덧셈의 계절


12월은 덧셈처럼 시작한다. 마법 같은 색과 함께 시작한다. 붉은색과 초록색이 어울려 노래 속 박자에 맞춰 이리저리 흔들린다. 음악은 달콤하고, 영화 속 주인공들은 긴 연휴에 어울리는 예측 가능한 결말을 향해 걸어간다. 맛있는 핫초콜릿과 수면양말을 신고 무릎담요를 두른 채 그 세계를 기꺼이 지켜본다. 내가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한 듯한 근사한 착각 속에서 한두 시간을 보낸다. 사랑은 그렇게 쉽게 전달되고, 마음을 맞아주는가 보다.


Love makes the invisible visible.


돌이켜보면 길고 감정적인 기록보다 짧게 적힌 메모들이 오히려 그 시절의 나를 정확히 데려온다. 요란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때의 내가 어떤 감정에 있었는지 말없이 보여준다. 예전 노트 한 권을 펼치다 그 안에서 이 문장을 다시 만났다.


“Love makes the invisible visible.”

사랑은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한다.


이 말을 했던 R은 길 위의 작은 생명들에 대해 진심이었다. 우리는 못 보고 지나치는 고양이나 강아지를, 그들의 작은 목소리를 듣고 보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그녀 방식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의 말이 맞다. 내가 마음이 가면 남들은 들리지 않는 그의 발걸음에서 피로를 듣고, 무심히 던지는 손의 움직임에도 숨기고 싶은 마음을 읽는다. 사랑은 그렇게 작은 흔들림을 우리 안으로 데려오는 마법이다.


하지만, 이 신비로운 힘이 언제나 우리에게 변함없는 기쁨과 든든한 버팀목을 안겨주는 것만은 아니다. 사랑의 싹이 튼 그 감정의 씨앗들은 우리의 마음을 햇살과 물이 되어 쑥쑥 자라게도 하고, 한순간 시들어 죽어버리게도 한다. 사랑은 그렇게 변하고 움직이며 우리 마음에 멍을 던져 놓기도 한다. 생긴 상처는 시간이 가면서 치유되기도 하지만,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남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사랑하기를 망설이고, 어느새 멀리 앉아 바라만 보게 되기도 한다.


뺄셈의 사랑


스무 살의 내가 적어 둔 글.

또 다른 문장을 마주한다.


"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을 얻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등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 로맹 가리


어린 나는 왜 이런 어두운 문장을 마음에 두었을까. 아마 로맹 가리의 삶 자체가 내게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외교관, 작가, 전쟁 영웅이라는 화려한 덧셈의 명함을 가졌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기대와 세상의 시선이라는 무게 아래 놓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 뒤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짓누르던 기대를 덜어내고, 외롭고 고독한 이들이 사랑이라는 피난처를 통해 세상을 버텨내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겉으로는 단단하고 탄탄하게 보이는 이도 상처와 외부의 압력에 아무렇지 않을 순 없다. 그의 삶은 그가 한 말처럼, 사랑을 세상과의 투쟁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는 곳으로 정의했으나, 그의 마지막은 그 피난처가 모든 어둠을 치유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장 사랑했던 이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그는 또다시 자신만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랑이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칠 곳이 되어 줄 수는 있지만, 내면의 절망을 모두 지켜 내기에는 너무나 연약할 때도 있다.


묵묵히, 어둠을 지나는 한걸음


12월은 덧셈과 뺄셈이 동시에 존재하는 달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반짝이는 노래와 평화로운 종소리 그리고 따뜻한 조명이 있는 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조용하고 깊어진 그림자가 드리운 달이기도 하다.


높이 오르지 않고, 깊이 떨어지지 않는 답은 어쩌면 아주 작고 일상적인 곳에 있을지 모른다. 사랑이 우리를 드라마처럼 어둠에서 구해줄 것이라는 환상을 내려놓고, 대신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 짐을 조금씩 덜어 주는 일. 그 조용한 ‘뺄셈’이야말로 우리를 천천히 밝은 곳으로 이끌지 모른다.


사랑은 큰 소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말없이 옆에서 걸어주는 그림자와 같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들고, 다시 하루를 이어가는 그 단순한 반복을 멈추지 않도록 조용히 곁을 지켜준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시간이 조금씩 모여, 어느 순간 어둠의 터널을 이미 지나왔음을 깨닫게 되는 바로 그때, 그 순간을 함께 서 있는 그 자리가 아마도 사랑이 가장 밝게 빛나는 순간일 것이다.


12월의 문 앞에서


12월이다.

누군가는 들뜬 마음으로 가장 빛나는 계절을 맞이할 것이고,

누군가는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견딜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비를 피할 곳을 찾을 것이다.


12월이다.

마무리를 해야 하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해야 하는 달.

어딘가에서 캐럴이 흐르고, 누군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그 사이사이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작은 움직임이 있다. 올해의 마지막 빛과 어둠을,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지나가기를 바란다.



https://youtu.be/sgBldNsK-xw?si=ctN8PrKxo4023tT4





Image 001 : The Love Letter, Jean Honoré Fragonard, early 1770s

작가의 이전글마음의 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