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에 정리를 하고 살아남은 물건들 속에서 이전에 사용했던 핸드폰을 발견했다. 올드 폰을 켜 보니, 옛 사진들이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해댄다.
사진을 하나씩 보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은 훌쩍 넘어갈 것만 같아, 보고 싶은 마음을 눌러봐도, 이미 손가락은 썸네일 쏙 사진들을 하나씩을 눌러본다. 한 이미지에 멈춰서 물끄러미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걷던 사람
어느 날,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이 회사 앞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동네에는 노숙자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옷차림이나 행세가 영락없이 ‘나는 홈리스’라는 그가 눈에 띄었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걷는 그를 보았다. 표정은 없다. 앞만 보고 계속 걷는다. 다른 홈리스들처럼 한가득 살림살이를 카트에 넣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작은 배낭 같은 것을 매고 있지도 않았다. 맨 몸으로 걸었다.
어느 날 심하게 야근을 하고 집에 가는 중에, 자동차 헤드 라이트 너머로 그가 걸어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그는, 동서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이 길의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들도 잠들어 있는 시각에, 낮에 어딘가를 향해서 가고 있었던 그가 밤길을 따라서 다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홈리스들도 어두워지면 밤을 피해 어딘가에서 잠을 청할 텐데, 그는 어딘가 잠시라도 쉴 곳을 찾지 못한 것일까. 밥은 조금이라도 챙겨 먹었을까, 너무 무서워서 걷기만 하는 걸까, 언제까지 걷는 걸까, 뭐라도 챙겨줄까, 아니지 아무도 없는 이 밤에 괜히 창문을 통해 물이라도 건네다가 원치 않는 일을 당할 수도 있어, 줄려면 날이 밝을 때 주도록 하자. 그런데 그는 어디서 온 걸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걷는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도 그와 함께 끊임없이 걷기를 시작했다.
마사이 족을 연상하는 외모에, 단 한 번의 ‘힐껏’도 없이 앞만 보고 걷기만 하는 그에 대한 신경 쓰임은 계속되었다.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면, 날씨가 추워지자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을 Recycle 하는 거리에 서 있는 우체통 같은 곳에서 득탬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날씨 좋은 날 도로 옆 잔디에 누워 햇살을 즐기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 당시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치의 미소와는 비교할 수 없는 Organic-Happiness로 mother of nature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시간이 모이자 계절들이 지나가고 회사 안, 내 방에 있는 달력은 매일을 버티면서 몇 해를 매달려 있었다. 또다시 새 달력을 바꿔 달 때가 되었을 즈음, 나는 이직을 했고 새 직장은 반대쪽 방향에 위치했기에 그 길도 어느 듯 잊혔다.
2년쯤 지난 어느 날,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고, 그를! 보았다. 이제는 살림살이가 들어있는 카트를 끌고 있다. 반갑기도 했지만, 예전보다 조금은 느리게 걷는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차를 세우고 그의 뒷모습을 찍었다. 그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가 걷기 시작한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사진 속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앞만 보고 걷지 않으면 단 하루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다시 한번 그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먼 이곳에서 보내어 본다. 어쩌면, 이제 내가 앞만 보고 걸어야만 하는 시간을 맞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예전에 걷기를 시작했어야 했던 것 같다. 흔들리는 낙엽에도 놀라 옆을 보고 뒤를 보고, 잔 가지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웅크리는 것 말고, 앞만 보고 걷기부터 했어야 하는 것이 맞다.
오래된 핸드폰의 전원을 꺼 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앞만 보고 걷고 있는, 걷는사람들을 응원해본다.
'자, 이제 당신 차례다.' 라며 내 등을 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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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