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토녀의 크리스마스 선물

[여덟 번째 진담]

by 소담


남편과 맥주를 마시다가 문득 테토녀와 에겐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나는 당연하게도 스스로를 에겐녀라고 생각해왔는데, 남편은 내가 테토녀라고 했다. 정말? 내가 그렇게 테토야? 왠지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런데 돌아보니 확실히 나에게는 테토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다. 연애 경험이 많지 않은 편인데도 무려 두 번이나 상대에게 고백을 했으니 말이다. 그중에 한 번은 중학교 3학년의 12월이었다.

당시 나는 한 남학생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애는 야무지고 똘똘하고 목소리도 좋고 리더십도 있으며 아무튼 멋졌다. 올림픽공원으로 사생대회를 갔던 어느 날, 그애가 지하철 승차권을 끊는 뒷모습을 보면서 ‘함께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떠나긴 어디로 떠나겠어 집으로나 가야지, 싶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애의 뒷모습만 봐도 설렜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의 무수한 날들이 흘러갔다. 나는 그애를 바라보고, 그애는 날 못 본 채로 말이다. 단짝 한 명만 나의 짝사랑을 알고 있었다. “고백해 봐”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그애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도 모를 것 같았다.

어느덧 12월이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의 12월은 기분이 이상한 달이었다. 이대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더 이상은 그애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짝사랑의 마음이 점점 커졌고 애가 탔다. 게다가 왠지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로맨틱한 느낌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내 단짝은 반의 남학생과 300일이 넘도록 연애 중이었다. 그래서 단짝 남자친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가는 길에 나도 동행하게 되었다.

"남자는 두 종류로 나뉘어. 그레이가 어울리는 남자와 네이비가 어울리는 남자야". 단짝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고(지금 들어도 명대사다), 네이비가 어울리는 그애에게 꼭 맞는 털장갑이 눈에 들어왔고, 어느새 선물을 사버리고 말았다.

선물을 어떻게 그애에게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 떨리고 창피한 순간이라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애에게 선물을 주었고,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조차 전하지 못한 채로, 크리스마스는 지나갔다.

크리스마스는 좋은 거다. 선물을 주고도 고백은 아닌데? 너 좋아하는 거 아닌데? 그냥 크리스마스라서 준 건데? 할 수 있으니까. 어쨌든 나는 선물을 주었고 내 마음을 던졌다. 물론 상대방은 내게 마음을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재미있는 건, 그애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그 뒤로도 3년 동안 오며가며 마주쳤다는 사실이다. 더 재미있는 건, 대학교에 진학한 뒤에 반창회를 하여 그애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애는 엄청난 수다쟁이였고, 내가 좋아했던 것은 그저 허상이었구나 싶었으며, 그렇게 내 짝사랑은 완전히 끝이 났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하면 그때 그 네이비 장갑이 떠오른다. 가장 뜨거운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한 크리스마스였으니까 말이다. 남자는 두 종류로 나뉜다. 그레이가 어울리는 남자와 네이비가 어울리는 남자로. 참고로, 남편은 그레이가 잘 어울리는 에겐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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