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열한 번째 진담

by 소담

‘겨울’하면 생각나는 것.


눈, 눈사람, 귤, 붕어빵, 크리스마스…….


그리고 눈밭 위를 걸어가는 두 사람,

두 사람이 낸 발자국,

새로이 내릴 눈이 덮어버릴 그들의 흔적.



겨울이 올랑 말랑한, 눈이 내릴랑 말랑한 계절이 되면 으레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이 작품은 눈 내린 풍경으로 시작한다.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그해의 첫눈이 내린 날이었고, 열아홉 살이던 내가… 정확히 스무 살이 되던 날이었다. 길고 쓸쓸히 이어진 빈 논과 드문, 드문 서 있던 나무들…. 창밖의 어둠과, 덜컹이며 교외를 달리던 버스가 생각난다. 아무리 달려도 아무도 서 있을 것 같지 않은 풍경이었다."







사실 이 작품에는 여러 계절들이 담겨있다. 별일 없이 흘러간 봄밤, 주인공이 두 편의 짧은 소설을 완성했다는 여름. 다시 돌아오는 계절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겨울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랑이 벚꽃 아닌 눈꽃을 닮았기 때문인 것 같다.



지붕에 눈이 너무 많이 쌓이면 무너져 내릴 것을 걱정하듯이,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받은 그녀는 지레 이별을 얘기한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내린 눈처럼,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눈꽃은 아름답지만, 언젠가 녹아버리고 말듯이 둘의 사랑 또한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보인다.

다만 ‘그 겨울 눈이 참 예쁘게도 내렸었지’와 같은 느낌으로, 나에게 그러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 눈이 녹아도 사라지지 않을 발자국을 서로의 마음속에 남긴 채로 두 사람은 이별한다.



그리하여 매년 겨울이면 책장에 꽂혀있는 이 소설을 흘낏 보게 된다. 다시 읽어볼까? 싶다가도, 소설 속 그녀처럼 '아니, 아니에요'를 되뇌다가 이번 겨울에는 마음먹고 펼쳐 보았다.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녹거나 증발하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이야기.







"더없이 짧은 순간이었겠지만
나는 영원히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저마다의 불을 밝힌 전구들과, 서로의 불을 밝힌 그녀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