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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 비엣남 Dec 31. 2019

#03. 첫 직장 - by Um

베트남에서 만난 나의 첫 직장

베트남의 일자리는 한국에서 보통 '일한다' 할 때 상상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다. 사무실의 전경, 직장의 위치와 근무환경, 회사 내에서 주어진 역할까지 모든 것이 판이하다. 요즘 들어 스타트업이나 서비스업종 등 도시의 화이트칼라 일거리가 많이 늘고 있다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베트남 최대 규모의 투자 국가이고 대부분의 투자는 전자와 봉제 등 공장 제조업에 집중되어있다. 염가의 인건비로 주 6일을 일하는 베트남에서 반듯한 넥타이를 매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출근하는 풍경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베트남에 가기로 결정하던 순간에도 이런 근로 환경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한 전자회사를 베트남 첫 번째 직장으로 고민할 무렵에야 공장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인지할 수 있었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군대도 다녀왔고, 고독한 장기 해외생활 경험도 적지 않았던 터라 공장의 외로움이나 주변 환경 따위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캐리어 두 개에 배낭 하나 그리고 통기타를 메고 공장에 들어갈 때, 나의 마음가짐은 수도원으로 향하는 수도사 같았다. 2~3년만 눈 딱 감고 지내면서 언어를 습득하고, 기초 사업자금을 모을 계획이었다. 캐리어 한 칸을 가득 채운 책과 새로 구입한 기타를 벗 삼아서 말이다. 


그렇게 수도사의 마음으로 취직했던 직장 K사에서 5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다. 나는 끈기나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곳은 자존심이나 근성 따위를 들먹이며 1년을 버틸 만한 최소한의 가치도 없었다. K사는 하노이에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외곽 도시의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슈퍼마켓도 택시를 타야 하는 고립된 곳, 이른 저녁에도 해가 떨어지면 짙은 어둠에 잠기는 깜깜한 동네, 나는 그곳을 어둠의 도시라고 불렀다.


나는 공장 건물 바로 옆에 세워진 사원 기숙사에 살았다. 토요일도 오후까지 근무하는 K사에는 일요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자유가 없었다. 기숙사 근처에는 극장은커녕 동네 커피숍 하나 없었다. 평일에는 공장과 기숙사, 기숙사와 공장만이 무한반복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지만, 퇴사를 결심한 이유는 그깟 고립감이나 외로움 따위의 사소한 감정이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직장과 다를 바 없는 (꿈을 꿀 수 없는) 업무 환경, 여건 대비 턱없이 낮은 급여와 높은 근로 시간, 군대에서 조차 겪어보지 못한 인격 모독이 그곳에 있었다. 과연 어둠의 도시답게, 그곳에서 나는 미래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이나 희망을 품을 수 없었다. 


K사를 포함한 전자회사 대부분은 S사를 갑 중의 갑으로 모시는 제조 공급의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공급망의 두 번째 단계에 품질과 납기로 갑질을 일삼는 1차 협력사가 있었고, K사는 그 보다 아래에 있었다. 회사 내부도 신분제 사회였다. 차장이니 부장이니 하는 직급이야 짬밥으로 먹은 거라고 치면 되지만, 주재원(본사 파견)과 현채(현지 채용)를 구분 짓고 급여와 복지에 큰 차등을 두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한때는 피라미드의 정점인 S사의 경쟁사에 근무했던 나에게 신분상승(?)을 미끼로 하는 공장장 J의 위협과 회유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볼 때면 검지 손가락을 길게 뻗어 내 머리를 꼭 두 차례나 꾹꾹 밀어 댔다. ‘똑바로 하지 않으면 주재원 전환은 없다.’며 겁박했다. 입사 3개월 차, 그놈에게 정강이 조인트를 까였을 때 마음속 옐로 카드에 불이 들어왔다. 4개월 차, 십 수 명의 베트남 직원들이 모여 있던 자리에서 내 보고서를 찢었을 때, 레드카드가 켜졌다. 이튿날 나는 사직서를 던졌다. 인수인계를 빌미로 한 달을 더 버틴 후에야 어둠의 도시를 탈출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과거를 다시 회고하고 있노라니 나와 비슷한 시기에 베트남에 정착하여 첫 직장을 구했던 벗들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친구들의 첫 직장 이야기를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니, 베트남에서 첫 번째 직장이 갖는 의미가 생각 이상으로 크다는 세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 첫 직장은 현지 적응력과 생존력을 배양하는 기반이 된다. 

이직이 준비되지 않은 조기 퇴사는 신중해야 한다. 나는 운이 좋게 다음 직장으로 바로 이직하였지만, 첫 직장에서 일찍 퇴사를 하는 경우에, 현지에 남지 않고 구직 활동이나 휴식을 핑계로 한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치명적인 문제가 없는 한 최소 1년 이상 근무할 것을 권한다. 다음 직장 이직을 위한 최소한의 경력으로 활용이 가능하고, 무직 기간을 견딜 수 있는 생활비 마련 및 현지 생존력 함양을 위한 최소한의 기간이다. 이것이 어렵다면, 퇴사 전 반드시 이직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인생 커리어를 결정짓는 중요 요소다. 

먼저 언급한 대로 베트남에는 크게 전자와 봉제 두 개의 업계로 구분된다. 어떤 업계로 들어가던지, 한번 경력을 쌓기 시작하면, 다른 업계로의 이직에 제한 사항이 많이 생긴다. 일례로, '봉탈’(봉제 탈출)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는 봉제업계 종사자를 좀처럼 찾기 힘든데, 베트남에는 아직도 봉제업계 종사자가 많다. 그들은 말한다. 봉제업계는 다른 업계와 결을 달리하고 있어서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평생 봉제 쟁이가 돼버리기 쉽다고. 이미 첫 발을 내디뎌 버려서 슬픈(?) 봉제인의 마음이 '봉탈' 두 글자에 녹아나 있다.


셋째, 인간관계와 취미생활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회사마다 조직마다 사람들의 수준이나 질이 다르고, 구성원들의 여가 및 취미생활을 즐기는 방법이 천차만별이다. 주말이면 골프 라운딩을 도는 회사에서 골프 천재가 된 선배가 있고, 삶의 낙이라고는 술과 여자뿐인 회사에서 유흥에 빠진 친구가 있다. 어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미리 아는 것은 어려울 테니, 입사 후라도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인생에 악영향을 끼칠 것 같다고 판단되면 위 언급한 첫 번째 사항을 고려해서 빠른 결단을 해야 한다. 


나의 베트남 첫 번째 제조업계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금방 끝나버렸다. 나의 공장 생활이 암흑 같았다고 다른 제조업 근로현장을 매도하고 싶지 않다. 또한 후배들의 전자나 봉제업계로의 취직을 만류하지 않는다. 같은 공장에 함께 입사해 몇 년 만에 임원을 꿈꾸며 중역급 역할을 감당하는 친구가 있고, 봉제 쟁이 생활 몇 년 만에 봉탈이 아닌 봉제 창업을 꿈꾸는 선배도 있다. 베트남은 아직도 굴뚝과 공장으로 상징되는 제조업이 기초인 나라다. 그리고 그 제조 바탕 위에 세워진 빠른 경제 성장이 나와 우리를 이 나라에 살게 하고 꿈을 꿀 수 있게 한다. 


가끔은 하노이 시내를 벗어나 K사 방향으로 향하는 도로를 지날 때면, 문득 과거에 품었던 각오와 의지, 수도승의 마음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는 한다. 나의 베트남 첫 번째 직장, 공장장 J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운명은 지금쯤 어떻게 바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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