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의 혼자놀기
개인주의자의 놀이는 남들과의 화합과 경쟁에서 발현되지 않고 자아의 몰입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안 공황 강박 같은 탓을 이만 멈추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난 천성이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부모, 누나들과 놀자며 칭얼거리는 것이 아이의 당연한 태도일테지만 난 그다지 그들과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놀아달라는 칭얼거림 하나 없이 아이는 장난감 하나만 가지고도 수시간을 홀로 잘 보냈다고 한다. 둘이 쳐야 비로소 놀이가 되는 배드민턴도 그저 라켓, 셔틀콕 하나만 덜렁 챙겨든 채 집에서 오십 보도 채 되지 않는 윗동네 넓은 교회 주차장에서 하늘을 향해 통통 홀로 셔틀콕을 몇 번 칠 수 있나 나와의 대결을 하곤 했다. 그것은 나와의 투쟁이다. 놀이란 것은 항시 진지함과 대비된다며 가볍게 생각해버리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놀이를 하는 이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진지한 가면을 쓰고 한다. 그들은 진심이다. 30개를 연속해서 치지 못하고 돌아가면 나는 죽는다! 따위의 엄청난 대가를 되새기며 나는 힘껏 셔틀콕을 상대방이 아닌 공중으로 보내 개수를 더해갔고, 실제 죽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내게 닥쳐올 끔찍한 전제를 목표 삼아 무아의 지경으로 몰입을 하곤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서른 개를 훌쩍 채우고 나서야 나는 마음 속 6살 요절을 면했다.
방학 숙제로 나온 곤충채집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함께 했다면 훨씬 수월히 잡았을테지만 나 홀로 잡겠다는 별스러운 고집를 내세우고 집을 나섰다. 정수리 위에 있던 해가 갈색 벽돌 집 너머 저물도록 잠자리채는 몇백의 채찍 소리를 냈을까? 자신의 몸집보다 어림잡아 세배는 큰 잠자리채를 홀로 든 아이는 미처 여물지 않은 육체로 기어코 잡아냈다.
그렇게 난 점점 나 자신과의 몰입. 나 자신과의 놀이에 진득이 빠져들었다.
독립적 태도는 청소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기 소년에게 PC게임은 폭넓은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다. 조금은 재미 없더라도 집단에 속하기 위해 관계의 확장을 위해 게임을 택하지만 난 그저 내가 재밌는 게임을 했다. 이용층 대부분이 아저씨들인 그 시기에도 무척이나 올드했던 게임. 친구 창은 언제나 비워져 있더라도, 피시방에 여럿 친구들과 같이 가더라도 여전히 난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했다. 친구를 위해서 친구관계를 위해 흥미 없는 게임을 하지 않았다. 내겐 어떠한 관계보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몰입할 수 있는 놀이이가 더욱 중요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지 나에게 귀 기울이고, 나와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