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거짓을 모른다.
혼자서도 잘 놀아요. (2) 에서 이어집니다.
그린다는 행위는 참으로 신비롭다. 벌거벗은 나를 보는 듯하다. 성찰이다. 나를 돌아보게 한다.
드러냄에 굉장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마음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아 절충 속에서만 적당히 드러낼 뿐이다. 모순적이게도 아웃사이더스러운 성향과 맞지 않게 아카이브를 착실히 쌓아가고 끝없는 자기 어필을 해야 살아남을 직업을 택했다. 예체능 대학을 다니면서도 난 누군가에게 내 작업을 쉽사리 보여주지 않았다. 불만족스러운 작업이었으니까. 완성이 되면, 더 보완이 되면. 끝없는 자기검열로 난 단 한 번도 내 속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 불완전한 것을 드러낸다는 것은 내 약점을 만천하에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이십대가 거의 다 지나도록 내 속에 것들을 꽁꽁 싸매고 살았다.
대학시절 전공 필수 과목으로 들었어야 했던 조소 수업을 제외하고는 그림을 그려본 기억이라고는 수업이 마치길 기다리며 교과서 구석 틈틈이 그리던 낙서 밖에 없다. 그림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 스토리보드를 그릴 때면 투박한 원과 막대들로만 사람을 그려댔다. 1년 지난 지금 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전히 연필을 깎을 줄도 몰라 연필 깎기에 돌돌 돌려버리고 만다. J가 그림을 그릴 버릇 하는 것이 업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함께 그림 재료를 구매하러 가자고 했다. 마음먹은 그날 합정역에 가 두터운 스케치북과 6B 연필을 내 공간으로 데려왔다. 생각도 없던 객식구이다. 맞을 준비도 하지 않고 불쑥 들어온 그들은 쉽사리 날 떠날 생각이 없다.
그려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작업 계정을 만들어보는 건 어떠냐며 또다시 J가 설득했다. 나만 지니고 있다 한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며 보이기 싫어도 보여야 하는 세상이랜다. 싸이월드 이후 처음으로 SNS를 개설했다. 가명, 성별, 나이, 무슨 일을 하는지 꽁꽁 숨긴 채 그렇게 그림을 올려댔다.
잘 그렸다 못 그렸다를 따지기도 우스운 그림 그저 일단 그리면 올려대기 시작했다.
난 그런 사람이다. 이 그림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볼 테면 보고 말려면 말아라. 단지 내가 쌓여가는 것을 보고 싶은 사람이다. 그렇게 난 그날부터 일주일에 한 그림 정도는 인스타그램에 꼬박꼬박 올리고 있다. 누군가에게 SNS란 쉽고 재미난 일이겠지만 드러내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내게 이것은 세상 속에 나를 보이겠다는 포효다. 더 이상 드러내기를 거부하지 않겠다는 척박한 마음을 벗어나려는 청년의 발자국들이다.
그림에게 감사한 점은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중 하나만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그림은 포기의 미학이다.
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다. 날 갉아먹고 곪게 하는 것이지만 멈출 수 없다. 타고난 나다. 난 굉장히 피로한 사람이고 같이 일하는 이들에게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임을 안다. 일이 완벽히 완성이 될 때까지 나는 식사, 잠 따위는 거른다. 모든 것을 거스르고 그것이 내 맘에 완벽히 드는 그 순간까지 해야 직성이 풀린다. 한데 그림은 그게 아니더라. 못하는 놈이니 수정은 끝이 없다. 색이 이상하고 선이 이상하고 수정에 수정을 더하니 그건 더욱 기괴하며 작위적이었다.
나의 수준은 아직 이 정도니 더 이상 여기서 진전시키지 않고 이쯤에서 오늘의 그림을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서른이 다되어서야 포기를 배웠다.
클라이언트 없이 오직 내가 재료가 되었기에 가능한 전제 조건이지만 그림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 짓을 할 때는 어떤 생각도 안 해도 된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획을 긋고 색을 덮고 섞을 뿐이다.
번잡함 밖에 모르던 내 머리통에
적막을 안겨준다.
그날 내 계정의 피드를 내리며 J는 말했다.
"넌 노인을 자주 그린다? 담배 피우고 휴식하고 책 보고 이런 그림 말이야"
말이 맘 속에 맴돌았다. 피드를 소상히 살펴보니 참으로 그렇더라.
난 쉬고 싶구나. 휴식을 원한다고 또 다른 내 자아가 끝없이 말하는구나.
그림 속 내가 말하고 있다. 하나 일 땐 몰라도 둘이 셋이 되고 백이 되니 말을 한다.
그림은 한 장의 추상화된 일기다. 무언가를 그리고자 할 때 그날의 나의 기분이 어땠는지에 따라 듣는 노래의 음악이 달라지고 조명이 달라진다. 시간도 달라지고 장소도 달라질 수 있다. 이 획은 이 선은 이 색은 어떻게 나왔는지 배경은 왜 이리 진한지 연한지 배경을 하지 않았는지 나는 보인다. 정돈된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머리카락 왜 바뀌었는지 그림 속 내가 말한다.
그 날, 그 순간 내가 어땠는지 내가 뭘 원했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그림은 결코 거짓말하는 법이 없다.
글은 어지러운 사고를 모아 오밀조밀 조립해 써내려 가는 선택적 추상이라면 그림은 벌건 민낯을 보여 준다.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방전되고 위로가 필요한 날은 스스로 위로하고 싶은지 억지스러운 기쁨이 묻어난 그림이오
기분이 퍼렇게 식어버린 날은 위로도 불가능한지 그림도 그렇게 퍼럴 수가 없다.
그림이 쌓여감에 따라 날 응원해주는 분들은 차차 늘어나 2천에 가깝게 되었다. 너무나 감사하지만 난 SNS를 시작할 때 그러한 숫자에 절대 연연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감사함과 내가 가야 할 길은 다르다. 그들의 기호에 맞춰 내 그림을 고착화하고 싶지 않다. 그림만큼은 나를 위해 남겨두고 싶다. 난 이미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를 변명가득 한 이유로 지독히 많이 떠나보냈다.
미련한 나에게 포기와 돌봄을 가르쳐 준 그림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림 속에 내가 드러난다.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를 알아차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