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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Jan 25. 2022

바지를 반대로 입을 확률

인간이 설마 그러겠어요?

 전 종종 바지를 반대로 입습니다. 정확히는 잠옷인데요. J는 그런 내 모양을 보며 놀리기 일상입니다. 

사실 집에서 입는 바지라 별생각 없이 입는 것도 한몫하겠지만 나름 변명을 놓자면 바지 그놈들은 한통속입니다. 입이라도 맞춘 듯 하나같이 주머니가 없구요. 또는 주머니의 모양만 그럴싸하게 박음질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얼룩덜룩한 체크들로 도통 어디가 앞인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중구난방 앞 뒤로 입어서일까 통통한 엉덩이 덕에 바지의 앞뒷면을 쉽게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입든 뒤로 입 든 몸만 덮으면 됩니다. 그랬습니다.


 화장실 문이 전신 거울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나는 하루에도 몇 번 험상궂은 몰골을 몇 번이고 봐야만 합니다. 두어 달 전 화장실을 갈 때마다 반대로 입은 바지가 보입니다. 그것이 열중 하나라면 신경을 안쓸터인데 며칠 체감으로는 반절을 넘어서는 듯했습니다.


 J의 말이 떠오릅니다. 

넌 반대로 더 자주 입는 것 같아. 

정말 그럴까요? 궁금해졌습니다. 단지 평이한 일상이 뒤틀렸을 때가 기억에 남기 때문이 아닐까요? 거꾸로 입었다는 것에만 의미가 부여되어 우리 머릿속에 남는 것일 겁니다. 


 일상적인 사건은 우리에게 자극을 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말이죠. 샴푸로 머리를 감는 것은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바디워시로 머리를 감아 미칠 듯한 거품이 나는 낯섦이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가설이자 확신입니다. 


  나이가 몇인데, 다른 이들에 비해 멍청한 짓들을 곧 잘 하지만 그래도 네발 길 때를 빼고는 평생을 바지를 입어왔습니다. 암 그렇고말고, 내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날부터 외출복이 아닌 집에서 편히 입는 수면바지들을 입을 때 앞뒤를 개의치 않고 편하게 입은 후 화장실을 갈 때마다 내 바지의 앞뒤를 확인했다.


앞이면 ㅇ 뒤면 ㄷ 메모장에 체크를 시작했다.


                                      ㅇ

                                      ㄷ

                                      ㅇ

                                      ㅇ

                                      ㅇ

                                      ㄷ

                                      ㄷ

                                      ㄷ

                                      ㅇ

                                      ㄷ

                                      ㄷ

                                      ㄷ

 

이응과 디귿이 도로를 줄지었습니다.  


 거 뭐 잉여스러운 짓인가 싶지만

세상에 쓸모 있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니까요.

 

하루가 쌓이고 일주일이 쌓이고 화장실에 들어가 이응과 디귿을 적는 건 곧 내 루틴이 되었습니다. 


 오늘이 100회째일 겁니다. 마지막은 뒤네요. 

 76대 24입니다.

반대로 입은 게 76입니다.

반대로 입는 일은 특별한 해프닝이 아니었습니다. 

 이따금 그렇게 입는 것이 아닙니다. 

난 J의 말대로 주로, 보통, 반대로 입었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채로 응당 인간이라면 그래야만 한다 자만했는데 졸지에 바지 하나 제대로 못 입는 놈인걸 스스로를 증명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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