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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Jan 21. 2022

알약 봉지로부터

지난날을 되새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지만

 내가 사는 집은 참 좁습니다. 사실 너무 좁아 집이라 하기도 민망합니다. 가뜩이나 좁은데 책도 많습니다. 물욕이 다 책으로 가버렸는지 어쩌자고 자꾸 사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내가 사랑하는 책들을 가로로 아무렇게나 책장에 방치할 수 없어 버려 버릴 놈들은 야심 차게 버릴 생각에 책상 서랍들과 잘 쓰지 않는 천장 가까이 있는 수납장을 모조리 꺼내 대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먹은 닭가슴살을 모조리 게워내지 않고는   첫사랑에게 쓰다만 편지부터 소식 알 길이 없는 작은누나의 농협 봉투 안 투박해 적힌 편지. 엄마의 사랑 담긴 쪽지 여럿. 어디 구석에 박혀있었나 봅니다. 대학시절 학사경고를 받았던 종이부터 매달렸던 과제들부터 잡동사니 구경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습니다. 분명 이 맛에 대청소를 하는 걸 테지요.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2010이름 석자. 세월을 맞아 여러 획들이 날아가버린 신경과 약봉지를 발견했습니다.

 온기 가득했던 내 얼굴은 금세 식어버렸습니다. 


 먹어 치웠던 봉지였던지 비닐 반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투명한 색은 쌩쌩하네요.  생생한 꼬락 써니가 마음에  듭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요. '거봐 아직 나한테 벗어나지 못했! '라며 비웃는 듯합니다. 봉지 주제에. 손으로  꾸겨  힘을 다해 가득  종량제 봉투 제일 밑바닥까지 뚫고 서야 그 약 껍데기를 놓았습니다.


 지난 병원 방문 때 수면제를 반알로 줄여보자는 의사의 권유와 함께 홀쭉해진 약봉투를 가지고 왔는데요. 첫날 잠에 드는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려 고생했습니다. 플라세보 효과든 뭐든지 간에 그 후 2주간은 이 약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동안 걱정 없이 자던 나는 다시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난 아직은 손톱만도 못한 저 알약들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놈입니다. 


 10살. 내 생에 첫 불안장애가 왔습니다. 다음날 병원을 가보고 싶단 자식의 부탁에 부모는 따뜻한 구원 대신 회피를 택했습니다. 최악입니다. 난 기대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막돼먹은 인간입니다. 거절. 거대한 박탈감 감 앞에 아이는  도망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기댈 곳이 없다는 게 그리 서러웠을까 눈을 아무리 틀어막는다 한들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내 몸을 덮어쓰고도 한참은 남는 이불솜 뭉치를 입안에 가득 넣어 소리 없이 비명을 참았습니다. 불안이 휘감는 걸 버텨내겠다며 온몸에 힘을 주며 꽉쥔 주먹 한가운데는 살점이 뜯겨나간 흉이 하나둘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버텼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봤자,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지만 2022년에 보이는 2010년의 약봉투는 10살의 어린 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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