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을 되새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지만
내가 사는 집은 참 좁습니다. 사실 너무 좁아 집이라 하기도 민망합니다. 가뜩이나 좁은데 책도 많습니다. 물욕이 다 책으로 가버렸는지 어쩌자고 자꾸 사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내가 사랑하는 책들을 가로로 아무렇게나 책장에 방치할 수 없어 버려 버릴 놈들은 야심 차게 버릴 생각에 책상 서랍들과 잘 쓰지 않는 천장 가까이 있는 수납장을 모조리 꺼내 대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먹은 닭가슴살을 모조리 게워내지 않고는 못 볼 첫사랑에게 쓰다만 편지부터 소식 알 길이 없는 작은누나의 농협 봉투 안 투박해 적힌 편지. 엄마의 사랑 담긴 쪽지 여럿. 어디 구석에 박혀있었나 봅니다. 대학시절 학사경고를 받았던 종이부터 매달렸던 과제들부터 잡동사니 구경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습니다. 분명 이 맛에 대청소를 하는 걸 테지요.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2010년, 이름 석자. 세월을 맞아 여러 획들이 날아가버린 신경과 약봉지를 발견했습니다.
온기 가득했던 내 얼굴은 금세 식어버렸습니다.
먹어 치웠던 봉지였던지 비닐 반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투명한 색은 쌩쌩하네요. 저 생생한 꼬락 써니가 마음에 안 듭니다. 썩 기분이 좋지 않아요. '거봐 아직 나한테 벗어나지 못했지! '라며 비웃는 듯합니다. 봉지 주제에. 손으로 꽉 꾸겨 온 힘을 다해 가득 찬 종량제 봉투 제일 밑바닥까지 뚫고 가서야 그 약 껍데기를 놓았습니다.
지난 병원 방문 때 수면제를 반알로 줄여보자는 의사의 권유와 함께 홀쭉해진 약봉투를 가지고 왔는데요. 첫날 잠에 드는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려 고생했습니다. 플라세보 효과든 뭐든지 간에 그 후 2주간은 이 약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동안 걱정 없이 자던 나는 다시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난 아직은 손톱만도 못한 저 알약들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놈입니다.
10살. 내 생에 첫 불안장애가 왔습니다. 다음날 병원을 가보고 싶단 자식의 부탁에 부모는 따뜻한 구원 대신 회피를 택했습니다. 최악입니다. 난 기대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막돼먹은 인간입니다. 거절. 거대한 박탈감 감 앞에 아이는 도망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기댈 곳이 없다는 게 그리 서러웠을까 눈을 아무리 틀어막는다 한들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내 몸을 덮어쓰고도 한참은 남는 이불솜 뭉치를 입안에 가득 넣어 소리 없이 비명을 참았습니다. 불안이 휘감는 걸 버텨내겠다며 온몸에 힘을 주며 꽉쥔 주먹 한가운데는 살점이 뜯겨나간 흉이 하나둘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버텼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봤자,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지만 2022년에 보이는 2010년의 약봉투는 10살의 어린 나를 떠올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