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를 한 쌍커풀 짙은 남자가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뿌리고 다니는 영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또한 나는 노인을 대변할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나름 시대 흐름에 순응한 채 젊음의 해택을 받는 젊은이 입니다.
수년 전 경상도와 서울을 오가는 장거리 연애를 하던 나는 서울역에 있는 맥모닝을 좋아했습니다. 짭짤한 빵과 나름대로 깔끔한 맛의 햄버거, 가지각색 바쁜이들이 함께 똑같은 메뉴를 먹는 모습. 전광판 기차 시간을 힐끔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했거든요. J가 알면 서운하겠지만 헤어지기 전날 다음 만날 날을 그리며 아쉬움을 토해낼 때면 한편으로 내심 내일 아침 적당히 배를 채워 줄 맥모닝이 기다려졌답니다. 내가 탈 시간은 언제나 바쁜 아침을 먹는 이들로 매장을 가득 채울 정도였고 무인 주문기로만 주문을 받았습니다.
9시 40분 차를 타기 위해 20분 즈음에 버거집에 도착했고 어쩐일인지 내 앞 노부부는 무인 판매기 앞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햄버거를 드시고 싶은지 이것저것 꾹꾹 눌러보다 취소를 수 없이 반복해 내심 속으로 그들을 다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메뉴를 골라야 할지 몰랐을 겁니다. 단지 햄버거라는 음식을 먹고 싶었을 뿐이지만 눈앞 온갖 메뉴 중 하나를 택하고 나면 추가 재료를 선택하라느니 콜라의 용량을 늘릴지 커피로 바꿀 건지 따위의 수십 가지의 갈래길이 그들을 움츠리게 만들었습니다. 오지랖 부리길 죽을 만큼 싫어하는 나라도, 한 달에 한번 먹는 서울 땅 맥모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들의 주문을 대신했습니다. 나의 부모님처럼 염색을 하기 시작했는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까만 머리를 한 부부는 세상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생각했는지 쑥스러운 듯 조심히 고마움을 전하곤 떠나갔습니다.
차별은 거창함보다는 사소한 삶 속에서 누리지 못할 때
더 강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손가락 몇 번 까딱이면 끝날 공과금을 내러 기어코 은행까지 가야합니다. 여럿 음식들 사이 어떤 것을 먹을까 고르는 젊음 사이. 전쟁통을 방불케 하는 명절 열차 예매 사이트에도 그들의 자리는 없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능동적으로 바다 위를 항해하기 보다는 끝없는 바다를 단지 표류하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랜 시간 휩쓸려 왔던 그들에게는 이제 표류라는 단어조차도 버거워 보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나 때는 말이야 수없이 외쳐오며 찬란했던 '젊음'을 살았던 그들은 점차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한 때 그들이 시대에 스며들 공간이 없는 고집스러운 콘크리트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나의 부모님이 되었고, 부모님들은 분명한 우리들의 미래라는 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연인과 하는 우스갯소리로 미래에 코딩의 세상이 다가온다면 우리는 내가 그토록 말했던 '그들'이 될 것입니다. 필연적인 미래에 우리는 어디에서 얼마만큼 어떻게 밀려나버릴까 내심 두렵습니다.
내 '젊음'이 사라지고 새로운 '젊음'이 나의 자리를 채울 때 누군가도 우리를 위한 오지랖을 좀 부려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긴 하지만 난 그 후로 오지랖을 꽤나 부려보고 있습니다.
시대를 대변하는 효율성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분 1초 1원이 아쉬운 시대 인력을 줄이고 시간을 줄일 수 있다니 얼마나 발전적인 세상입니까.
단지 효율이라는 사회가 만든 거대한 파도에 휘청이는 작은 선박도 여럿 있음을 함께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오지랖, 자존심이란 말들은 기꺼이 접어두고 사라질 '젊음'과 사라진 '젊음'이 서로에게 조그마한 위로 정도는 거리낌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