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꼬마 Dec 26. 2020

추억에 민감한 아이

소설 <한계령>을 읽고

  현재를 사랑하면 과거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된다는 걸 혹시 알고 있는가.


  추억돌이.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다. 그 누구보다 현재를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모든 현재를 사랑한 나머지 ‘추억돌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추억을 훼손시키려 할 때 나도 모르게 표정관리가 되질 않는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얼마 전에 초등학교 친구의 SNS를 보다가 놀라운 게시물을 하나 발견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7명이 함께 놀고 있는 사진이었다. 모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들이었다. 만약 그 게시물에 그들이 누구인지 표시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 추억 속에 존재하던 통통한 여자아이는 날씬하고 예쁘장한 숙녀가 되어있었고, 친구가 자기를 놀렸다며 펑펑 울던 꼬마는 어른스러운 염색을 한 여대생이 되어있었다. 스마트폰의 전원을 끌 줄 몰라 헤매던 나를 도와주던 그 친구는 말쑥하게 살을 빼고 펌을 한 성인이 되어 있었고, 피아노를 치던 모습이 정말 멋있었던 그 남자아이는 제법 어른의 옷을 소화하는 청년이 되어있더랬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전혀 친하지 않았던 것 같은 그들이 어른이 되어 술을 마시고 있는 그 사진 두 장은 나에게 묘한 감정을 주었다.



  먼저 든 감정은 질투심이었다. 나의 추억 속에 이렇게 생생하게 남아있는 이 사람들이 추억에서 나를 뺐다는 사실에 꽤나 배신감이 느껴졌다. 물론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초등학생 때 엄청나게 친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더더욱 그랬지만 내 추억 속의 인물들이 모임을 하는데 그곳에 내가 없다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나의 추억에 균열을 일으키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로 든 감정은 이질감. 그들이 나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과 얼굴을 하고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 내 기억 속에는 언제까지나 초등학생인 그들이 성형수술을 하고, 염색을 하고, 어른의 옷을 입고, 어른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마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들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수가 없는데, 하는 현실 부정은 그다음이었다. 물론 그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할 이유도, 내가 그들을 제제할 수 있는 이유도 없다. 그것을 알기에 그 감정들은 잠깐 묘하게 흘러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 두 장의 사진은 4개월이 지나도록 어쩐지 잊히지가 않는다. 왜일까.



  <한계령>이라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인 미화의 소식을 듣고 너무나도 반가워하지만 차마 그녀를 찾아가지는 못한다. 고향도, 가족도 모두 변해버린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어린 시절과 고향의 기억 지표는 오직 미화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노래를 잘 하던 친구의 모습이 마지막 기억이었던 그녀에게 미화가 노래로 먹고산다는 소식이 기쁘게 느껴질 만큼 그녀는 추억을 기억하고 생각한다.


  ‘일 년에 한 번씩 타인의 낯선 얼굴을 확인하러 고향동네에 가는 일은 쓸쓸함뿐이었다. 이제는 그 쓸쓸함조차도 내 것으로 남지 않게 될 것이었다. 누구라 해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고향은 지나간 시간 속에 있을 뿐이니까. 누구는 동구 밖의 느티나무로, 갯마을의 짠냄새로, 동네를 끼고 흐르는 긴 강으로 고향을 확인하며 산다고 했다. 내게 남은 마지막 표지판은 미화인 셈이었다. 보이는 것들은, 큰오빠까지도 다 변하였지만 상상 속의 미화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미화만 떠올리면 옛기억들이, 내게 남은 고향의 모든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곤 하였다. 허물어지지 않은 큰오빠의 모습도 그 속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새부천클럽에 가서 미화를 만나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떤 표지판에 기대어 고향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



  내게 그 친구들은 벌써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 초등학교의 유일하게 생생한 기억들이다. 장소와 물건들은 잘 기억나지 않아도 그들이 웃는 모습, 자주 하던 말, 성격까지 모두 생생하다. 아마 내 인생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행복이 거의 대부분이라서 그런 것 같다. 내가 나온 초등학교는 집 근처에 있어서 운동하러 가기 편한 데다 막냇동생이 현재 재학 중이라 굳이 궁금하지 않아도 자주 찾아가고 소식도 종종 듣는다. 큰 행사를 다목적실이나 급식실에서 하던 나의 추억과는 달리 언제 생겼는지 모를 강당에서 그런 행사를 한다는 사실이나 매주 월요일에 하던 조회를 지금은 희귀하게 한다는 사실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분명 같은 장소지만 그곳에 계시는 선생님들조차 알지 못할 추억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들의 세상에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잡을 수 있었던 추억이 친구들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려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연락하는 유일한 초등학교 친구 2명과 만날 때면 매번 만날 때마다 하는 이야기임에도 지금보다 더 철없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깔깔대곤 한다. 그 친구가 그랬지, 저 친구가 그랬지. 그러다가 가끔은 그들의 새로운 소식이 들리기도 한다. 그 친구 초등학교 졸업하고 외국 갔다가 이번에 돌아왔다는데 들었어? 같은. 그럴 때면 기분이 묘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친구들의 소식들. 물론 차마 친구라고 부를 수 없는 사이지만 내 기억 속 영원한 친구인 그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한계령>의 주인공이 변해버린 고향에 대해 느끼는 바와 비슷하다. 분명 같은 장소와 사람이지만 그 어디서도 나의 추억을 느낄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그렇게나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유독 연락이 오랫동안 끊겼다가 다시 연락이 된 친구와 만날 때면 설렘과 함께 불안함이 앞선다. 혹시 그 친구가 나의 새로운 모습에 실망하면 어떡하나, 반대로 내가 실망하면 어떡하나. 그래서 나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 전에 가끔 그들의 이름을 SNS에 쳐보곤 한다. 안 나오면 말지만, 나온다면 나는 그 친구가 요즘 어떻게 사는지, 현재는 어떤 얼굴과 모습을 하고 있는지 훑어본다. 혹시 내가 추억과는 너무 다른 친구의 모습의 실망해버리진 않을까, 하고.



  하지만 <한계령>의 주인공과는 조금 다른 면도 내게는 존재한다. 좋았던 과거를, 추억을, 기억을 결코 붙잡고만 있지는 않는다. 내게 새롭게 다가오는 현재와 행복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이 내가 주인공과는 다른 점이다. 맨 처음 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현재를 사랑하면 과거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말. 내가 과거를 사랑하는 이유가 결국은 행복하고 새로운 현재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그 모든 현재로 이루어진 과거의 추억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행복한 현재 때문에 ‘마지막’이라는 말에 크게 울컥하고, ‘추억’이라는 말에 크게 민감하지만, 결국은 새로운 ‘시작’과 ‘현재’가 다가올 것을 알기 때문에 눈물을 용감하게 닦아내는 것이 나의 태도다. 만약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가 ‘술’을 마시자며 나를 부른다면 나는 흔쾌히 나갈 것이다. 떨리고, 불안하겠지만 그들이 새롭게 행복한 현재를 만들어줄 것이라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과거는 결국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언제까지나 과거를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결국은 그것도 행복한 과거가 될 것이기 때문에.



  <한계령>의 주인공은 과연 ‘좋은 나라’로 미화를 보러 갔을까? 제발 그랬길 바래본다. 어릴 적 친구와 다시 새로운 현재로 과거를 만들어나가길 내가 누구보다 그녀의 발걸음을 응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제까지나 어린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