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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꼬마 Jan 28. 2021

아니 영화 말고, '동화' <미녀와 야수>

동화 <미녀와 야수>를 읽고

  <미녀와 야수>는 다른 동화에 비해 조금 덜 접하게 되는 동화다. 동화책을 한창 읽을 시기에는 많이 읽는 이야기지만,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아기 돼지 삼형제> 등에 비하면 덜 대중적인지라 커서도 자주 접하게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 읽은 <미녀와 야수>는 정말 오랜만에 읽게 된 동화였다.



  내가 어렸을 때는 동화책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만 봤던 것 같은데 내가 20대가 되는 동안 영화 <미녀와 야수>가 생겨났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싶었으나 어쩌다 보니 동화책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찌나 오랜만인지 낯선 이야기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정말 새롭게 느낀 큰 감정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불편함’이다.



  나는 어렸을 때 주인공과 조력자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나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고, 그런 나쁜 인물들이 동화책에만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동화 속 악역들을 크게 불편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이번에 읽은 책은 벨의 언니들의 사치와 허영에 대해 묘사하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동화를 읽으며 느껴본 적이 없었던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어렴풋이 '짜증'이었던 것 같다. 벨의 입장에 갑작스레 이입이 되면서 저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얼마나 짜증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인드가 현실적으로 변한 것이다. 저런 나쁜 사람들이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고, 저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을 때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있으며, 저런 상황에서 웃으며 다 해주는 벨이 더 미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다 알아버렸다. 그런 모든 설정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동화를 읽으며 느끼는 첫 감정이 ‘짜증’이라니. 이질적이다.



  불편한 것은 또 있다. 야수가 아버지를 살려 보내며 딸 중 한 명을 보내라고 한 것은 엄연한 성매매가 아닌가. 자기 맘대로 애인을 만날 수 없으니 그런 강제적인 방법으로라도 여자를 만나겠다는 끔찍한 의지로 보였다. 그런 야수의 행동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줘서 자신을 다시 사람으로 바꿔줄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피해를 주고 다닌 것으로 보이기만 했다. 그렇게 강제적인 방법으로 잡아 와놓고, 잘해주면 다 괜찮아진 것처럼 묘사하는 것도 불편한 부분 중 하나였다.


  게다가 야수에게로 딸을 보내면 거의 성매매나 다름없을 것이라고 분명 아빠도 예상했을 텐데 거기로 딸을 보낸 아빠도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기도 살고 싶었을 테고, 벨이 가겠다고 했으니 어쩔 수야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목숨과 딸을 뒤바꿨다는 마인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언니들의 벌은 어디 갔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물론 언니들이 벌을 받을 만큼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그럼 언니들은 결혼해서도 사치와 허영에 득 차 산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가벼운 죄라지만 권선징악이 기본 베이스인 '동화'에서 나쁜 사람들에 대한 벌이 없다니. 제일 소소한 것을 바랬던 것은 벨이지만 재앙도 벨이 받았다. 동화 자체는 해피엔딩이지만 불편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결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국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 벨에게 잘생긴 왕자님이 왔다는 것은 어떤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시련도 참고 견뎌라? 부모님을 잘 따라? 외모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라? 이런 교훈들이라면 야수에게 잡혀들어가는 최악의 상황이라도 견디라는 것일까? 나를 야수에게 보내버리는 부모라도 사랑하라는 것일까? 야수를 사랑하는 서사지만 결국은 잘생긴 왕자와 결혼하는 이야기인데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은 아닌 것 같고, 잘생긴 왕자라는 일종의 보상을 갖기 위해서 견뎌야 하는 시련들이 너무 많고 고달프다. 무슨 사람 가지고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하다고 느꼈다. 저런 시련까지 견뎌야 보상이 오는 걸까. 아니면 동화 특성상 아이들의 무의식에 강렬하게 박히기 위해 극단적인 요소를 사용한 것일까.



  어렸을 적 동화를 볼 때는 주인공의 서사에만 주의를 기울였던 것 같은데 20대가 되어서 동화를 읽으니 어릴 적에 비해 그 뒤 서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왠지 애니메이션은 다시 보고, 영화는 꼭 보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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