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인에는 대개 이유가 없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악인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그들은 원래부터 악인이었다.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악인인 이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몇 인물에게는 악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안타깝거나 불쌍하여 악인처럼 느껴지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감독이 그들의 감정선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다섯 명의 괴물 아빠 중 리더인 석태는 어렸을 때부터 괴물을 보았다.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괴물이 됨으로써 그 괴물을 보지 않게 되었다. 화이가 괴물이 보인다고 했을 때 그는 화이가 자신과 같은 괴로움을 겪지 않길 바랬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에게도 ‘괴물’이 되기를 요구했지만 그것을 따르지 못한 화이는 ‘괴물을 삼킨 아이’가 되었다. 그들이 보는 ‘괴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감독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그냥 괴물 그 자체로 받아들여도 상관은 없겠지만 괴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문제는 괴물을 하나로 정의하기에는 영화 속에서 암시하는 그 두 사람의 괴물이 어딘가 닮은 듯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괴물이 동일한 듯이 연출되지만 사실은 그 두 사람이 보는 괴물이 다른 괴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감독은 이 영화의 화려한 액션에 대해 “액션을 위한 액션은 없다.”라고 표현했다. 대표적으로 도망치고 있는 화이를 쫓는 아빠들의 추격전이 그렇다. 언뜻 보면 평범한 액션신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그저 악당, 혹은 단순하게 아빠들이라고 생각했던 인물들의 개인적 성향들이 드러난다. 그중 동범의 웃음소리는 아빠들의 가지각색 태도 중 단연 돋보인다. 아들을 쫓고있는 상황이 마치 사냥감을 쫓고 있는 것 마냥 즐거워하는 그 모습은, 화이가 복수를 다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어진다.
냉철한 악인인 동범의 모습과는 반대로 울부짖으며 화이를 달래려 노력하는 아빠도 있다. 화이가 타고가는 차 타이어에 총을 쏴 화이를 멈추게 하려는 다른 아빠를 말리며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먹먹하게 “내가 잡을게.” 라고 이야기하는 운전 담당 기태. 자신이 가르쳐준 운전 기술을 그대로 아빠들에게 써먹는 화이를 보며 기태는 슬픔과 안쓰러움, 걱정 그리고 당황스러움을 모두 느낀다. 사실 이 감정은 비단 기태에게만 배당된 감정은 아니다. 아빠들은 화이를 범죄현장으로 끌어들인 순간부터 화이의 일탈을 걱정했다. 그래서 화이가 자신들이 가르쳐준 모든 기술을 완벽히 구사하는 모습을 보며 아빠들은 배신에 대한 흥분이 아닌 체념과 해탈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화이가 가장 어려워하는 아빠이자 화이를 가장 냉정하게 다루는 아빠인 석태도 마찬가지다. 그는 화이가 유일하게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화이와 정을 잘 나누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영화의 마지막쯤에서 화이의 괴물을 보는 모습이 ‘자신을 닮았다’고 표현하며 친아들 이상의 정을 보인다. 약했기 때문에 악해질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화이가 그런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그는 그 장면에서 모두 드러낸다. 비록 잘못된 부정이었을지라도 화이를 공격하는 경찰을 쏘며 다급하게 “이 벌레 같은 게 어디를 쏴.”라고 외치는 모습에서 피도 눈물도 없던 그가 얼마나 화이를 아끼고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다.
평생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살았던 석태와 화이. 석태는 그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것과 동화되어 언제나 자신의 약함을 숨기려 노력했다. 그에 반면 화이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것을 삼켜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했다. 각자 가진 두려움을 내보인 형체는 같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헤쳐나가고자 한 노력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 누구도 선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승리했다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실제 악의 어설픈 본질이며, 그 어설픔을 표현한 것이 이 영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