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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쓰지 말자 Oct 21. 2021

육아의 균형추는 맞춰질 수 있을까

행복으로 포장한 세상의 엄마에게 주어진 짐

내 안에 화가 올라온다.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다. 몇달전 울면서 육아불균형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고, 서로의 몇 가지 약속을 정했지만 예상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원래 사람은 관성에 따라 움직이고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성향이 있는만큼 나도, 신랑도 다시 원래대로 하고 있었다. 어린이집 알림을 보며 발을 동동 거리는 것도 내 몫이고, 반찬 준비를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아이들의 어린이집 일정을 챙기는 것도 내 몫이었다. 어린이집 상담 일정이나 영유아검진 등 내가 해오던 것의 역할을 분담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일정을 알려줘야 했고, 신랑은 시간되는 사람이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시간 되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말, 너무 쉽다. 시간은 누구나 없다. 만들어야 하는 것일뿐. 어떤 일에 가중치를 두느냐에 따라 시간은 생기는 것이기 마련이다. 물리적인 시간만 얘기한다면 내가 나을 수 있다. 새벽 출근에 오후 퇴근으로 상대적으로 시간이 날수밖에 없는 내가 결국 해야 한다는 얘기니까... 


그렇게 불만을 쌓아오다 터진건 얼마전이다.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2.5단계 격상과 함께 어린이집에서도 특단의 조치가 내려왔다. 그 전까지만 해도 긴급 보육 이용시 맞벌이 부모에게는 사유서 제출까지 요구하지 않았는데 맞벌이 부모들도 사유서를 내란다. 그러면서 등원하는 아이들이 2~3명으로 줄었고 잘 다니던 은성이도 우울해 한다고 어린이집에서 알림장이 왔다. 어느날 밤 "엄마 맞벌이가 뭐야?", "은성이 맞벌이란 말은 어디서 들었어?", "엄마랑 아까 이모님이 대화 나누는거 들었어", "응 맞벌이는 엄마 아빠 둘 다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야" "우리도 맞벌이가 아녔으면 좋겠어" 그 대화가 떠오르면서 마음에 걸렸다. 신랑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하고 등원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었는데 신랑은 "그거 이따 집에가서 얘기하면 안될까" "오늘 저녁에 늦게 온다며, 몇시에 오는데?", " 그걸 어떻게 알아. 만나봐야 알지"라며 서둘러 끊었다. 


그 이후로 내 맘은 굳게 닫혔다.  더이상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신랑 앞에서 집안 일은 그냥 같잖은 일에 불과한 듯한, 귀찮아서 끼고 싶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내가 유난을 떠는 걸수도 있다. 육아는 보통 엄마의 몫이라고들 하니까,  하지만 그 인식 또한 남성들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프레임일지도, 아무리 냉정하려고 해도 나도 그 프레임에 갇혀 '미안한 엄마', '불량 엄마'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자책한다.  내가 육아 불균형에 대한 불만을 , 육아 불균형에 대한 '단어'를 내 상황에 끼워맞추기 시작한 건 3년 전? 어느 남자 선배가 육아휴직의 경험을 얘기했을때였다. 어린이집 상담, 어린이집 준비물 챙기기, 병원 가기 등 아이와 관련된 모든 것을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을 때, 그 선배는 반대로 자기가 그 일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둘의 차이가 뭘까를 고민하다 발견한건 육아휴직이었다. 육아휴직동안 그 선배는 아빠임에도 육아의 주체가 됐고, 육아휴직이 끝나도 본인이 주체가 돼 아이 돌보는 일에 깊게 관여했던 것이다. 반대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집은 여성들의 몫이 되는 것또한 육아 테이프를 처음 끊는 것이 여자이기 때문이고, 그 이후엔 육아가 여자들에 익숙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때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난 계속 불평등에 시름을 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복직 전 몇가지 규칙을 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돌이표다. 매번 같은 일로 불만이 쌓였고, 조금 달라지는가 싶으면 다시 원상복귀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엄마가 더 하는것같고 뭘 그리 예민하게 반응하냐고, 


지인에게 지금의 나의 불만을 얘기하니, 자기도 그 때 (아이가 6살, 4살), 이혼을 생각했었다고 한다. 모든게 싫었다고, 다 놓고 떠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왜 그렇게 우울해 했나. 모든 상황을 심각하게 여겼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유쾌하게 상황을 넘겨보라고 조언한다. 불만을 갖기 보다 유쾌하게 남편에게 시키란다. 어제는 나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신랑은 밥 먹고 설거지까지 한 뒤 쌀까지 씻어놨다.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나로서는 전날 쌀을 씻어놔야 한다. 신랑이 설거지를 하더라도 쌀을 씻어놓는 건 자주 잊었고, 몇차례 쌀 좀 씻지 라는 푸념을 해야했다) 그 과정이 귀찮지만 반복적으로 시켜서 자기의 일이라는 인식을 줘야 하나라는 생각도 든다. 신랑은 뭘 해야 하는지 모를수도 있다. 그리고 왜 내가 왜 불만을 느끼는지도 모를수도 있다. 유쾌하게 시켜볼까?  누군가 육아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育兒, 아이를 키우는 것 이상으로 育我, 나를 키우는 과정이라고...육아를 하면서 부부관계 또한 큰 전환점을 맞게된다. 그 전까지는 그냥 맛보기였다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부는 '희노애락'을 거침없이 겪게된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 것을 내려놔야 하는 순간, 그 억울함이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된다. 결국 이걸 극복하는 과정이 育我일텐데...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 순간 역시, 그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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