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를 사랑한 소녀
이 책이 내게 주는 이미지는 ‘환상’이다.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도심 한 가운데 살아온 나로서는 그려지지 않았다. 다 일고 나서 드는 생각은 너무나 아름답고 마음이 저리고 슬프고 행복한 여러 감정의 소설이다. 카야는 습지에서 나고 습지에서 자랐다. 습지를 떠나서 살 수 없었고 그래서 문명사회 속에 충실히 살아가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온 인생을 보면 결국 카야의 생존법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카야의 엄마가 집을 떠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6살 카야에게 엄마는 삶의 전부였다. 시를 읽어 줬고, 그림을 알려줬고, 예의를 알려줬다. 하지만 아빠는 달랐다. 인생의 낙오자, 패배자였던 아빠는 모두가 피하는 존재였다. 엄마 역시 아빠의 폭력을 참지 못했고 결국 떠났다. 엄마가 떠난 이후 언니들과 오빠들도 하나씩 카야의 곁을 떠난다. 카야의 바로 위 네살 터울 오빠 조디는 떠나기 전 마지막 조언을 한다. “카야, 조심해. 꼭 누가 와도 절대 집 안에 들어가지 마. 널 잡아갈 수도 있어. 습지 깊은 데로 도망가서 덤불에 꼭꼭 숨어. 발자국 지우는 거 잊지 말고. 오빠가 가르쳐줬잖아. 너도 아버지를 피해 숨을 수 있어”
카야는 그때부터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간다. 6살 꼬마아이가 스프를 끓이고 빵을 굽고 요리를 시작한다. 아빠 눈에 띄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으로...하지만 난폭하고 망나니 같던 아빠에게도 아빠로서의 다정함과 책임감이 묻어나는 순간이 짧게 있었다. 그 잠깐 기간동안 ‘점핑’(잡화점 운영, 흑인;책에서는 점핑이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임에도 아이들의 놀림 대상이 된다)을 소개해 준 것, 카야가 수집하는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군용 배낭을 준 것. 이 두 가지가 아빠로서의 마지막 역할이었다. 아이들을 보내달라는 엄마의 편지를 받은 아빠는 온갖 분노를 쏟아내며 편지를 태웠고, 카야를 두고 습지를 떠났다.
그때부터 카야는 ‘혼자’ 살아간다. 당장 돈이 없었고, 배를 타고 나가기 위해 필요한 기름도 없었다. 카야는 이제 살아 나가기 위해 홍합을 캐고 점핑에게 갖다 준다.점핑은 홍합을 계속 받아줄 수도 있었겠지만 혼자 살아갈 카야에게 ‘진짜 살아갈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홍합만으로는 계속 돈을 주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준다.
“미스 카야, 현금을 벌 수 있는 다른 길을 궁리해봐요.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아두면 낭패를 봐요”
카야는 또다시 방법을 찾아간다. 낚시를 해서 잡은 물고기를 소금물에 절이고 훈제한다. 결과물은 살이 다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진 생선, 도저히 팔 수 없는, 아무도 사지 않을 훈제 생선이지만 점핑은 받아준다. 훈제 생선 값으로 점핑의 부인 메이블은 카야가 입을 옷가지와 신발들을 준다. 훈제 생선은 카야가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매개물이었을뿐. 카야는 외부 사람들과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고, 숨어 살았다. 백인쓰레기, 습지소녀(마시걸) 등 카야를 칭하는 호칭은 대부분 혐오의 단어들이었다.
그렇게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가던 카야(15살 정도)는 등걸(줄기를 잘라 낸 나무의 밑동. 그루터기)에 ‘깃털’이 아주 꼿꼿한 자세로 꽂혀인는 걸 본다. 다음날 또 다른 깃털. 깃털의 종류는 희귀하고 다양했다. 카야의 재능 중 하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 채집한 조개껍데기나 곤충 새 깃털 등을 실제와 아주 비슷하게 매우 섬세한 펜의 터치로 그려냈다. 등걸에 꽂혀있던 깃털들도 카야의 스케치 대상이 됐다. 카야에게는 그 선물이 또 다른 희망이 됐다
“가족들은 늪에서 혼자서 알아서 살도록 그녀를 버리고 떠났지만 누군가는 카야에게 선물을 주고 있었다” 깃털을 가져다 준 건 테이트.
카야의 오빠 조디의 친구이자 어릴 적 마주친 적 있던 테이트였다. 테이트는 카야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고, 글을 가르쳐 준다. 카야가 글을 어느 정도 익힌 뒤 처음 읽은 책은 ‘모래군의 열두달’ , 책의 첫문장은 “야생의 존재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책을 다 읽은 뒤 이 문장을 다시 보게 되면 이 문장이 카야 전체 삶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단어가 이렇게 많은 의미를 품을 수 있는지 몰랐어. 문장이 이렇게 충만한 건지 몰랐어” 이후 테이트는 시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시의 단어들은 단순한 말이 아니거든, 감정을 휘저어놓지. 심지어 웃음이 터지게 하기도 해” “리듬잉 해변을 때리는 파도 소리 같네”. 혹시라도 시인이 된다면 카야는 메시지를 명료하게 쓰고 싶었다.
“바로 그때 한줄기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 수천 장의 노란 시카모어 낙엽이 생명줄을 놓치고 온 하늘에 흐드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을의 낙엽은 추락하지 않는다. 비상한다. 시간을 타고 정처없이 헤맨다. 잎사귀가 날아오를 단 한 번의 기회다. 낙엽은 빛을 반사하며 돌풍을 타고 소용돌이치고 미끄러지고 파닥거렸다” 테이트와 카야는 이 순간 처음으로 키스를 한다. 테이트와 카야는 책을 읽으며 자연과 함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으로 카야는 생일 축하도 받아본다. 테이트는 카야가 읽을 수 있도록 습지생태와 생물학에 관한 책들을 가져다 줬다. 카야는 생물학에 파고들면서 어미가 새끼를 떠나는 이유도 계속 찾아가려 했다.
하지만 테이트와 카야의 데이트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테이트가 대학에 붙으면서 습지를 떠나야했다. 테이트는 떠나면서 “절대로 잊지 않을거야. 돌아올 때까지 습지를 잘 보살펴줘. 낯선 사람들이 가까이 오게 하면 안 돼” 한 달 뒤 독립기념일에 오겠다고 했다. 카야는 살구색 시폰 드레스를 입고 테이트를 기다렸다. 카야는 테이트의 보트소리에 집중했지만 테이트는 오지 않았다.
‘잔인한 희망’, 그때 반딧물이를 관찰하던 카야는 암컷이 짝짓기를 한 뒤, 암호를 바꿔 또 다른 수컷을 잡아먹는 걸 본다.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악의 희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의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 보는 일이다”
카야는 왜 모든 사람이 자기 곁을 떠나는 것일까 묻는다. 그러면서 “어딘가 마음속 아주 깊은데서, 앞으로는 아무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겠다는 결심이 단단하게 뭉쳤다”
카야는 더욱 더 습지에 마음을 두었고, 카야의 수집품은 점점 높은 수준에 다다랐다. 분류법도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습지에서 마음을 달랬지만, 카야의 외로움은 점점 커져갔다. 그런때 체이스가 다가온다. 체이스가 미덥지는 않았지만 외로움은 체이스를 받아준다. 체이스에게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선물한다. 이후에도 카야는 체이스와 데이트를 이어간다. “카야는 그 눈을 들여다보며 진실을 찾았지만 거기엔 냉랭함밖에 없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카야는 체이스에 대한 자기 마음이 어떤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제 외롭지는 않았다” 체이스는 결혼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 말이 카야에게는 누군가와 가족이 된다는 설렘을 갖게 했다. 체이스는 그런 식으로 카야를 유인했고 카야의 첫남자가 됐다. 하지만 우연히 체이스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앞둔 걸 알게됐고, 그렇게 체이스와도 이별을 하게 된다. “인생은 혼자 살아야 하는거라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사람들은 결코 내 곁에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야” 카야는 엄마와 똑같은 덫에 걸려들었다. 음흉한 바람둥이 섹스 도둑들.
외로움을 아는 이가 있다면 달뿐이었다. 예측 가능한 올챙이들의 순환고리와 반딧불이의 춤 속으로 돌아온 카야는 언어가 없는 야생의 세계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한창 냇물을 건너는데 발밑에서 허망하게 쑥 빠져버리는 징검돌처럼 누구도 못 믿을 세상에서 자연만큼은 한결같았다.
체이스가 떠났지만 카야는 책을 출간하게 된다. 테이트가 소개해준 출판사와 계약을 하면서 책을 내게됐다. 카야가 그려온 표본 그림들. 테이트는 카야를 떠난 뒤 공부에 몰두했지만 카야를 잊지 못했다. 7월 4일에도 카야를 찾았지만 카야가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용기를 내지 못했다. 테이트는 카야에게 이별의 인사도 못한 채 공부와 성공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창창한 미래도 행복을 담보해주진 않았다. 그래서 카야를 찾았고 밀어내는 카야에게 책 출간을 제안했다. 카야의 수집 표본은 이 세상에 없는 희귀하고 진귀한 것들이었다. 그 작품을 알아주고 책을 내라고 제안한 테이트 덕에, 어쨌든 카야는 책을 내게 됐고, 어엿한 작가가 된다. 책 출간을 통해 받은 돈으로 집도 수리를 하고 밀린 세금을 내면서 카야가 사는 집에 대한 소유권도 받게 된다. 책이 출판되자, 떠났던 조디 오빠도 카야를 찾아온다. 책을 통해 카야의 소식을 접했고 카야를 만나러 온다. 그러면서 떠났던 엄마의 소식을 전한다. 엄마는 가족들을 떠난 뒤 친정에 갔지만 아이들을 데려와야 한다는 말뿐이었다고,, 말도 잃었다고 한다. 웃음도 잃고 외롭게 생활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다. 글을 몰랐던 카야는 엄마가 보냈던 편지, 아빠가 불태웠던 편지의 내용도 이때 알게된다.
카야는 테이트와 종종 책을 통해 만났지만, 카야는 여전히 테이트를 보면 숨었고 테이트 역시 강요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며 카야가 다시 마음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1969년 카야는 경찰에 잡힌다. “체이스 앤드루스의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소설의 시작은 체이스의 사망에서 시작한다. 누가 체이스를 죽였나 수사하는 과정에서 용의자는 카야로 좁혀졌고, 카야는 재판을 받게 된다. 구치소에서 면회를 하기 위해 끌려나가는 카야는 작은 창 너머를 바라본다. “바닷새들이 마을 항구 위에서 울고 있었는데 흡사 그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카야는 알리바이가 충분했다. 체이스가 사망한 날 카야는 출파사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시내로 나갔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야는 변호사의 요청에도 적극 대응하지 않았다. 체이스가 죽은 날 밤의 행적을 묻는 질문에도 입을 닫고 숨어버렸다. 재판은 관심으 모을 수밖에 없었다. 온갖 소문에 둘러싸였던 마시걸, 습지소녀의 재판이었던 만큼, 얼마나 기이할까 라는 호기심이 이 재판을 자극했다. 증인들은 때로는 편견에 사로잡혀 카야에게 불리한 증언을, 아주 가끔 주민들이 카야에게 대했던 편견을 반성하는 증언들. 카야에게 불리한 증언들도 실체가 없었다. 마시걸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추측에 근거한 말들이었다.
특히나 카야가 시내에 나가 출판사 관계자들을 만나 저녁시간에 숙소에 들어간 뒤, 다시 밤에 나와 습지로 와 체이스를 불러낸 뒤 망루에 올라가 떠 밀기에는 시간상으로도 불가능했다. 현장에는 발자국도 지문도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카야를 본 사람이 없었다. 새벽 1~2시 버스 운전 기사들은 젊은 백인남자와 할머니를 본게 전부였다. 거기다 카야는 버스를 타는 것도 서툴렀다. 길도 잘 몰랐다. 습지에서는 누구보다 앞설 수 있겠지만......카야에게 불리한 증언 중 하나는 체이스의 옷에서 발견된 빨간 섬유였고, 그 빨간 섬유가 있는 모자가 카야 집에서 발견된 것인데 그 또한 몇 년 전에 묻혔더라도 옷에서 나올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했다. 그리고 중요한 증거 중 하나인 체이스 목에 있던 조개목걸이가 없어졌다는 것. “항상 걸고 다녔어요. 한 번도 빼지 않았습니다. 4년 동안 그 목걸이 없이 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조개목걸이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카야의 집에서도...
“유죄를 함축하는 그 어떤 말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교도소에 가지 않을거에요” .
면회온 테이트에게는 “나를 잊어야해.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잖아. 난 남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 그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없단 말이야. 부탁이야. 이해가 안돼? 무서워서 아무하고도 가까워질 수가 없어. 못하겠어”
‘지배의 위계는 자연에서도 안정을 도모하지’ (법정을 바라보는 카야)
카야의 변호사 톰은 마지막 변론에 들어간다. “저는 바클리코브에서 성장했고 지금보다 젊었을 때 마시 걸에 대한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이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녀를 마시걸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많지요. 어떤이들은 반인반늑대라고 속삭였고,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잃어버린 사슬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안광을 발한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저 버림받은 아이였습니다. 유기되어 혼자 늪에서 배고픔과 추위와 싸우며 살아남은 어린 소녀를, 우리는 돕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하나뿐인 친구 점핑을 제외하면 우리 교회는 물론 지역사회 어떤 집단도 그녀에게 음식이나 옷가지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는 그녀에게 늪지 쓰레기라는 딱지를 붙이고 거부했습니다.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사숙녀 여러분,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캐서린 크라크를 소외시켰던 건가요 아니면 우리가 소외시켰기 때문에 그녀가 우리와 달라진 건가요? 우리가 일원으로 받아주었다면 지금 그녀는 우리 중 한 사람이 됐을 겁니다. ~중략 ~우리는 이 수줍은 외톨이 처녀를 재판해야 하는 책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사건에서, 이 법정에서 제시된 사실을 근거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루머나 지난 24년간 쌓인 감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학생들의 괴롭힘 때문에 평생 단 하루밖에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캐서린 크라크는 독학으로 유명한 자연과학자이자 작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습지소녀라고 불렀지만, 과학연구소들은 습지 전문가라고 인정합니다. 여러분이 수년간 들어온 거짓된 풍문이 아니라 이 법정에서 들은 사실에 근거해 평결을 내릴 거라고 믿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마시 걸을 공정하게 대우할 때가 온 겁니다”
그리고 나온 판결, 무죄.
카야는 다시 습지로 돌아왔고, 집에 오자마자 한 일은 빵 봉지를 들고 바닷가로 달려가 빅레드(갈매기)에게 빵을 주었다. 습지로 다시 나선 카야. 테이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테이트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카야와 테이트는 서로의 진심을 고백한다. 다시는 떠나지 않으리라. 둘은 첫날밤을 보냈고, 테이트는 청혼을 한다. 카야는 이미 ‘기러기들처럼’ 결혼을 했다고 화답한다. 카야는 이후 바클리코드(시내)는 가지 않았고 책쓰기에 몰입하며 습지에서 테이트와 시간을 보냈다. 둘은 죽을 때까지 습지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예순여섯, 카야는 저녁을 먹고 홀로 채집 여행에 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테이트는 카야를 찾아나섰다가 카야의 배를 발견한다. 표류하는 배 위에 뒤로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카야. 카야는 그렇게 조용히 떠나갔다.
카야가 남긴 유품과 수집품을 정리하던 테이트는 낡은 화덕 밑 장작이 쌓여진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장작을 몇 개 치우자, 비밀 문이 보였다. 그 안에 비밀 상자가 있었고 a.h 라는 이니셜의 시가 나왔다. 수십, 수백 장의 시. 어맨다 해밀턴의 시였다. 소설 중간중간 카야가 어맨다 해밀턴의 시를 독백하는 장면이 있는데, 알고 보니 그 시를 쓴 사람이 카야였다.
반딧불
그를 꼬드겨내는 건 밸런타인의 불빛을 깜박이듯 쉬웠지
하지만 숙녀 반딧불처럼
그 불빛들에는 죽음의 은밀한 부름이 담겨있네
마지막 터치, 끝이 아니야
마지막 발자국, 덫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네
그 눈이 내 눈을 꼭 붙들다
끝내는 다른 세상을 보지
그 눈이 달라지는 걸 봤어
처음에는 질문
다음에는 해답
마침내 끝
그리고 사랑 그 자체가 스쳐지나
그게 무엇이었든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가네
체이스를 죽인건 카야였다는 사실이 시를 통해 드러났다. 상자속에서 조개 목걸이도 발견한다. 테이트는 시들을 모두 태웠다. 체이스는 조개껍데기를 바다로 던져버렸다. 테이트는 다시 판잣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습지의 어두운 비원으로 손짓해 부르는 수백마리의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깊은 곳,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