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a Francia
Jan 03. 2022
1학기 기말고사 첫째 날. 전날 밤 하체 위주의 근력 운동을 한 여파로 전신을 관통하는 피로감을 느끼며 출근한다. 시험감독을 대비해 7시간 이상 잤는데도 개운하긴 커녕 더 졸린 기분이다. 교무실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핸드드립 커피를 진하게 내려서 얼음을 가득 넣고는 단숨에 마셨다. 카페인아 어서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다오.. 하며 물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고 씹어먹는 비타민도 한 알 까서 우적우적 삼켰다. 길고 지루한 시험시간을 맑은 정신으로 버티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1교시는 3-7 교실 부감독. 교실 뒤에 서서 아이들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멍을 때린다. 수능과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둔 이 아이들. 작년 내내 수업하며 이름과 얼굴, 성격과 성적 등 대부분의 신상을 익힌 친근한 녀석들. 얘들이 성인이 되어 어떤 삶을 살아갈 지 궁금하고 걱정되고 부럽다.
일 년에 4번 있는 시험 기간, 감독을 하는 시간 동안은 매뉴얼상 제약이 많다. 50-60분 동안 가만히 서서 문제를 푸는 학생들을 쳐다보는 일 말고는 다른 것을 할 수 없다. 메모를 할 수도, 활자를 읽을 수도, 휴대폰을 사용할 수도, 앉아있을 수도 없다(운 좋게 교탁 주위에 여분의 책걸상이 있으면 잠깐씩 걸터앉을 수는 있다). 학생이 답안지 교체를 원하면 신속하게 발견하고 바꿔줘야 하고 문제에 대한 질문이 있을 때는 해당 과목의 출제 선생님을 재빨리 모셔와야 한다. 교실 앞의 정감독과 교실 뒤의 부감독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시선이 마주치는 어색해지는 상황을 짐짓 피해 가며 주어진 임무-사뭇 근엄한 표정으로 붙박이처럼 서서 학생들을 주시하는 것-를 수행한다. 그렇게 몇 교시 연속 감독을 하다 보면 허리부터 다리, 어깨 등 신체 여러 부분이 아파온다. (하체가 더 튼튼해야 허리 통증을 줄일 수 있다기에 어제 그렇게 스쿼트를 한 것이다..)
감독관으로서 주기적으로 겪으면서도 시험시간은 늘 생경하다. 그건 아마도 이 시공간이 가지는 고요하고도 잉여로운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시험 교실에서 부정 행위 등의 이벤트가 발생하는 확률이 꽤 낮기 때문에(학교마다 격차가 심할 수 있음), 시험 시작 이후 10여분이 지나면서 대체로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다(수능시험 감독은 단연 예외였음). 읽다만 책의 뒷부분이 궁금해지고, 사야 할 물건이나 주말에 갈 여행지 같은 걸 검색하고 싶어 지고, sns에 들어가서 새 피드 게시물을 훑고 싶어 진다. 일기나 편지, 심지어 시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들기도 한다. 할 수 있는 행위가 없기에 머릿속에는 별 쓸모없는 생각과 상념이 꼬리를 물며 끝없이 부유한다. 그러다 지치면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텅 빈 상태에 진입하게 된다. 이때가 비로소 두뇌가 휴식하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멍 때리기 대회 주최측에서 말하긴 하더라만은, 어쩐지 사치스러울 만큼 잉여롭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내가 한정된 시간에 쫓기며 조급증을 앓는 현대인이라는 반증일까. 대체 다른 선생님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긴 시간을 보내는 건지 퍽 궁금하다.
왼쪽 맨 앞줄에 앉은 학생이 시험 종료 3분 전에 손을 들고 답안지 교체의사를 표현한다. 신속히 새 답안지를 건네고 제 한 시간 안에 마킹을 완성하지 못하면 기존의 답안지를 제출해야 함을 매뉴얼대로 숙지시킨다(시험 내공이 쌓인 3학년이라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알려준다). 제발 실수하지 말고 종 치기 전에 완성하거라.. 컴퓨터용 사인펜을 쥔 그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오늘 3시간 동안 있었던 일 중 가장 긴박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