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a Francia
Jan 14. 2022
오늘도 어김없이 생기부를 쓴다. 올해는 비담임이라 교과 세특(교과목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만 쓰면 되는데도, 그 방대한 분량에 압도당해 자꾸 회피하다 보니 아직 마감을 못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거대한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데 그 산이 어마무시하게 높은 거다. 의욕을 잃은 채로 올려다볼 때마다 ‘어느 세월에 저기까지.. 대체 어떻게.. 하아..’하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상황이랄까. 이럴 땐 하루치 분량을 정해놓고 그만큼씩만 꾸준히 하면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실천을 못했다. 벼르고 있던 일을 하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을 꾸준히 미뤄온 것이다.
방학이 시작된 후, 그간 사무치게 읽고 싶었던 책들 속에 파묻혀 보냈다. 학기 중 나의 직장 생활은 수업 준비, 교재 연구, 업무 진행, 공문처리로 시시각각 바빴고, 퇴근해서 귀가해서는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안아주느라 그보다 더 바빴다. 간절히 읽고 싶은 책들은 책상 한 켠에 켜켜이 쌓여갔다. 그 책탑을 볼 때마다 ‘방학이 되기만 하면 나는 저것들을 다 읽고 말 것이다..’ 하며 아쉬워하다 못해 화가 났다.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를 분노였다. 비로소 방학이 시작되고 독서 욕구를 조금이나마 채우고 나니, 이제 생기부 마감이 코앞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음에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상황이 이러한데 생기부를 쓰다 말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 진저리나지만.. 오늘까지만 봐주기로?하고 이어 쓴다.)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이 써낸 각종 쓰기 과제, 수행평가, 자기 평가지, 소감문, 보고서 등을 책상 가득 펼쳐놓고, 1500byte 안에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 녹여낼 것인지 고민한 뒤, 키보드를 두드린다. 활동 실적이 넘치는 학생들의 경우 그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 없기에 아이의 희망 진로와 조금이라도 더 관련 있는 내용을 선별해야 한다. 제출물의 양이 적은 학생들의 경우에는 그 최소한의 재료에 최대한 살릴 것이 있는지 살피느라 시간이 걸린다. 이런 식으로 수백 명에 대해 쓰고, 고치고, 오탈자 점검차 한번 더 훑은 후 마감한다. 이래저래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학번을 보며 해당 교실을 떠올리고, 그 학생이 앉아있던 자리를 기억해낸다. 그의 표정과 말투, 주로 취하고 자세 같은 것들이 한 장면이 되어 떠오른다. “쌔엠.. 너어무 피곤해요...”라는 말을 거의 매 시간 하던 K의 보고서를 마주하자 해독하기 힘든 그의 손글씨에 피로감이 몰려온다. K는 대체로 수업 시간 내내 의식을 놓지 않으려 사력을 다해 버티다가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대로 책상에 무너져 잠들었다. 학원 다니느라 인강 듣느라 바쁜 일상에 시달리고 있던 그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삶의 고단함과 버거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던 이 녀석. 방학인 지금도 어딘가에서 고3이 되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수면부족을 호소하고 있을 것만 같다.
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선한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던 Y의 정갈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온다. 수행평가 치던 날, 마치 소중한 것을 대하는 듯한 자세로 펜을 쥐고 시험지를 꽉꽉 채워 쓰던 그의 동그란 등을 교실 뒤편에서 바라봤었다. 나는 그의 이름 옆 칸에 ‘학업에 열의가 높으며 지적 호기심이 왕성함. 진중한 태도로 주어진 활동에 충실히 임하는 모범적인 학습자임’이라고 입력한 뒤 근거를 이어 붙인다. 교과서에서 인공지능에 관해 읽은 후 ‘알파폴드’와 ‘왓슨’을 조사한 보고서를 한/영 두 가지 버전으로 추가 제출했던 Y는 의대에 가고 싶다고 했다. 의사 가운을 입은 Y를 그려본다. 그렇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환자를 살피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면 그는 분명 꽤 멋진 의사일 것이다.
인생의 목표가 '혼자 힘으로 벵에돔 잡기'라는 M의 글은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기행문 쓰기 과제에서 그는 아버지와 함께했던 3박 4일간의 낚시여행을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써냈다. 시간대별 동선부터 매끼 식사메뉴, 자신이 낚았던 각종 어종과 낚시 장비에 관한 추가 설명에 이르기까지 디테일한 글을 읽으며 그 열정과 꼼꼼함에 나는 구체적으로 놀랐다. M은 교실에서 한결같이 과묵했기에 1년 동안 목소리 한번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는데, 벵에돔 낚시에 성공하면 그도 기쁨에 찬 환호를 내지르려나. 물고기 잡기에 몰두한 그의 얼굴이 문득 궁금해진다.
아이들이 각자 무언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들, 느끼고 깨닫고, 감명받았다는 것들에 대해 나는 읽고 또 읽는다. 진정성 있는 콘텐츠인지, 칸 채우기를 위한 아무말 대잔치인지를 가린다. 내가 그들에 관해 쓰는 이 1500byte 짜리 글이 이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지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저 지난 1년 동안 주 2회로 세팅되어 있던 우리들의 시간 속에 존재했던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남길 뿐이다. 그들도 나를 기억할 것이다. 수업 도중 자주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던 사람?자꾸 뭔가에 관해 써내라고 요구하던 사람? 가끔 수업시간에 멍 때리던 사람? 마음은 산만하고 정신은 나태하면서 잡념과 욕망만 차고 넘치는 나는 일을 하다말고 이렇게 무용한 상념들에 빠지기를 반복한다.
아무튼 학생들이 나에 대해 이처럼 긴 분량으로 쓸 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이번 주 안에는 기필코 이 일을 마무리 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