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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an 20. 2022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김하나 황선우

책 리뷰


  제목을 보고 ‘여자 둘이 사는 게 뭐 그리 특별한가?’ 했다. 표지 아래쪽엔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이라는 말이 부제처럼 적혀있다. ‘가족’의 탄생? 어떤 의미에서 ‘가족’이라는 말을 썼을까.. 내용이 한층 궁금해졌다. 읽어보니 과연 이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가족의 의미와 함께 개인의 삶을 타인과 공유하는 일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저자들은 서울에 거주하는 40대 여성으로 각자의 일을 가지고 성실히 경제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둘은 홀로 살아온 세월이 꽤 길었다는 점 말고도 수많은 공통분모(출신지, 나이, 문화적 취향 등)를 가지고 있는 친구이다. 수년간 서로 알고 지내며 신뢰를 쌓아오다가 같이 사는 일이 두 사람 모두에게 가져다주는 이점이 더 많다는 결론에 동의하여 동거를 시작했다.

  그 첫 번째 과정으로 살고 싶었던 동네쭉 주시해 온 30평대 아파트를 매매가의 반씩 부담하여 구입한다(그 과정에서 대출을 받았지만 2년 만에 모두 상환했다고 한다). 각자의 살림 중 중복되는 것은 하나씩(TV, 냉장고 등)만 들였으며, 같이 사용할 가구들(테이블 등)은 함께 신중히 골라 구입했다. 각자 두 마리씩 키우고 있던 고양이들도 모두 한 집에 살게 되었다. ‘서재 결혼시키기’ 의식을 통해 각자의 서가에 중복으로 꽂혀있던 책들도 한 권만 남기고 정리했다. 이 과정은 집을 공간적으로 셰어 하는 것을 넘어서 보통 남녀가 결혼하는 과정과 다름없어 보였다.
  
  이들은 단순 하우스메이트가 아니라 베스트 프렌드이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많이 안다고 확신하고 동거를 시작한 이들도 살림을 합친 직후에는 다양한 갈등을 겪었다(싸움 에피소드는 이 책에서 가장 재밌고 웃기는 부분 중 하나다). 함께 살기 전에는 좀처럼 알기 어려운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경악하고, 싸우고, 사과하고, 눈치 보고, 조율하기를 반복하며 안정을 찾아간다(결혼생활과 똑같잖아). 솔직히 이쯤 되니 ‘아.. 레즈비언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성적 지향을 정확히 명시하는 워딩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각자 이성과의 결혼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한다. 만약 누군가 먼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다시 집을 팔아 금액을 반반 나눠가지면 된다고 하니.

  이 연령대의 여성이 이와 같은 형태로 사는 모습을 내 주위에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에 몹시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나는 은연중에 결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연스럽게 그걸 했던 사람이었다. 그 후로도 또 자연스럽게 임신과 출산, 육아라는 수순을 이어갔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일련의 일들을 행하는 과정에서 내 개인의 성향이나 삶의 지향점, 사회적 시스템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있었던가. 미끄러지듯 ‘기혼 유자녀’라는 세계에 들어왔더니 전혀 예치 못한 의아한 일들과 시시각각 맞닥렸고, 그로 인해 적잖이 당황했다.(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많지만, 이 글은 결혼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비판하거나 그 실태를 고발하고자 함이 아니니 이쯤.)


p.185
그런데 문제는, 안사람인 나는 내 직업적 일을 집에서 하는 것이니 놀고 있는 게 아닌데도 집안일이 왠지 내 몫인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내내 집에 있으니 쓰레기도 내가 버리고 고양이 화장실도 내가 치우고 청소기도 돌리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개고… 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상했다. 집안일은 끝이 없고 집에 있으면 계속 할 일이 눈에 들어오니 자연스럽게 나는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말끔한 집으로 퇴근한 동거인은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나랑 수다를 떨고 트위터를 좀 하다가 자러 들어간다. 다음 날 아침이면 동거인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준비를 한 뒤 출근한다. 그러면 나는 동거인의 가방을 정리하고 떨어진 머리카락을 치우는 김에 청소기를 돌리고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쓰레기통을…이 되는 것이다. 자꾸만 그렇게 된다. 동거 초반에는 이것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왜냐하면 집안일은 욕조 수채 구멍부터 신발장 먼지까지 하려면 끝이 없으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투여되고, 동거인은 그런 디테일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인 데다 원래 이 집안일이라는 게 최선의 결과래봐야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어서 열심히 해봤자 티는 안 나고 조금만 손을 놓으면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첫째, 내가 밖에 나가 일하기 시작했다. 일하기 적당한 카페를 찾아 출퇴근을 했다. 집안일을 안 하는 방법은 집 안에 안 있는 거였다! 둘째는 돈이었다. 내가 집안일을 많이 한 주에는 가사 비용을 청구했다. 바깥양반은 군소리 없이 돈을 입금했다. 나의 스트레스도 '돈 받고 하는 일'이 되자 훨씬 나아졌다. 역시 명시적인 보상이 필요하다!!

p.230
생각할수록 각자의 가족에게 우리의 지위는 '꿀'이었다. 우리가 각각 결혼을 했다면 시댁 어른들과의 자리가 그렇게 편할까? 사위는 대접받지만 며느리는 오히려 대접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우리의 위치는 사위보다도 더 편했다. 딸내미랑 같이 사는 친구'는 각자의 부모님께 의무는 없이 호의만 받는 자리다. 내가 어머님이 보내주신 열무김치를 맛있게 먹었다 해서 효도 여행을 기획하거나 집안의 가전제품을 바꿔드려야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머니께 맛있다고 전해드려!” 정도가 끝이다. 우리는 각자의 부모님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뵈면 반갑고 베풀어주시는 호의에 감사한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친구의 부모님께 뭘 해드릴 의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효도는 셀프니까.

  이렇듯 기혼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저자들의 유려한 필력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유쾌하고 재미있고, 부러운 구석도 있다. 일례로 저자들은 책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친한 친구들 및 지인들을 소개한다. 함께 운동하고 술도 마시는 ‘망원 스포츠 클럽’ 멤버들이라고 한다. 이들과의 관계를 보면 시트콤 ‘프렌즈’가 생각난다. 부담 없이 서로의 집을 오가며 대화하고 식사하고 일상을 나누면서 삶의 불안과 긴장을 완화한다. 같이 살거나, 같이 살지 않더라도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고 개인적인 일상을 공유하는 관계. 이것을 ‘가족’이라 명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란 무엇일까? 더 나아가서 ‘좋은 가족’이란 어떤 관계일까.

  내 경우에 좋은 가족애정을 기반으로 서로를 온전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신뢰와 존중을 맨 밑바닥에 깔고 서로 배려하며 좋은 일과 슬픈 일들을 함께 나누는 관계. 반드시 남녀일 필요는 없고, 굳이 ‘결혼’이라는 법적 관계로 묶이지 않아도 무방한 관계.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함께 살며 서로에게 의존하고 위로하며 충분히 잘 살 수도 있다. 인생을 사는 정해진 방식이 존재하지 않고 정답도 없듯이 삶의 방식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삶의 가능성과 사고의 방식을 확장시켜주는 이런 이야기들이 더 많이 쓰여지고 읽혀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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