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물감 놀이를 하다가 싸웠다. 모처럼 침대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던 나는 울음소리를 듣고 거실로 뛰어 나갔다. 동생은 본인의 스케치북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고, 언니는 붓을 쥔 채로 씩씩거리고 있다. 동생이 물통에 붓을 씻는 과정에서 자신의 스케치북에 계속해서 물을 튀겨서 화가 났단다.화가 폭발한 그녀는 동생의 그림 정중앙에 검은색으로 거칠게 한 획 그었다.
화난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우는 아이를 달래주어야 마땅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부주의했지만 고의성이 없었던 동생의 행동에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첫째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아이는 항변을 할 테고, 나는 또화를 내게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화를 내는 건 충족되지 않은 욕구의 비극적 표현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육아를 하며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는 나는 대체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인가.
"물감 놀이는 여기까지 하자."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아이들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목욕물을 받아주고 나와서 형형색색으로 난장판이 된 거실테이블과 바닥을 박박 닦았다.
자매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동시에 서로 미워한다. 싸울 때는 철천지 원수처럼 으르렁거린다. 나도 자랄 때 그랬고, 아이들이 다투는 건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서로 잡아먹을 듯 사납게 굴 때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언제나 어렵다. 오은영 선생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단호하고도 다정하게 대처하셨겠지?눈물을 글썽이며 금쪽이를애청하고 그 많은육아서를 읽어댔는대도, 실전에서는 또 이렇게 무너진다. 이런 내가 싫어져서 또 다른 방식으로 화가 났다.
아이들이 욕조에서 첨벙첨벙 깔깔거리며 노는 소리가 들렸다. 한껏 올라왔던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도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토록 급변하는 감정이라니. 부끄럽고 동시에 웃겼다.
아이들을 재우고 책을 마저 읽었다. 각자 타고난 모습대로,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에 위로받고자러 들어가는 길이었다. 아이들 침대로 가서 얼굴을 한번 쓰다듬는데, 둘째가 뜨거웠다. 38도 정도의 열이 나고 있었다. 아이를 살짝 깨워서 잠옷을 벗기고 해열제를 먹였다. 벌거벗은 아이를 안아 내 침대로 데려가 눕히고 그 옆에 모로 누웠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 아이 몸을 닦으면서 아침까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아침에는 다행히 열이 조금 내려 있었다. 첫째를 등교시키고, 둘째를 데리고 집 앞 소아과에 갔다. 월요일 아침 소아청소년과의 풍경은 여전했다. 지쳐 보이는엄마나 아빠, 혹은 조부모가 저마다칭얼거리는 아이를 데리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주말 동안 아팠을 아이들과 그들의 보호자로 꽉 찬 대기실에는 앉을자리도 없다. 대기번호 19번을 받아 쥔 나는 아이라도 어디 앉힐 데가 없는지 기웃거렸다.
아기 둘을 데려온 한 젊은 엄마가 자꾸 눈에 밟혔다. 아기띠로 가슴에 안은 아기는 아픈지 하염없이 울고 보챘다. 그 아기의 누나로 보이는 3살가량의 여자 아이가 엄마 옆에서 칭얼대고 있었다. 엄마는 연신 아이를 달랬다. "00야, 지금 동생 때문에 못 안아줘, 조금만 기다려, 집에 가서 안아줄게." 하는 엄마 말을 납득하고 얌전히 앉아있기엔 첫째가 너무 어려 보였다. 아이는 급기야 바닥에 드러누워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는 참다못해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했지!" 주위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지만, 그런 것을 의식할 정신적 여유가 엄마에겐 없어 보였다. 급히 걸치고 온 듯한 외투에 말라붙어 있는 밥풀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20대 같은 앳된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드리워있었다.타인에게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잠시 아득해졌다. 그녀의 심정을 알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안들리는 척, 못 본 척했다.
병원에서는 내 둘째의 편도가 살짝 부어있다고 했다. 다행히 열이 내렸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아 유치원에는 보내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어쩌면 요가원에 시간 맞춰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차 안에 요가매트를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국에서의 대기시간이 상당해지는 바람에, 결국 요가는 놓쳤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 어렵게 주차하고 들어갔더니 아뿔싸, 휴관이다. 월요일인걸 그새 잊은 것이다. 나는 이제 뭘 하러 갈 것인가. 어쩐지 길을 잃은 것만 같다. 이유를 잘 모르겠는 이 헛헛한 마음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