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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Feb 03. 2023

가랑비처럼 내 삶에 스며든 타인들

요즘의 일기

방학에는 일기를 쓴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매일 선생님께 검사받는 일기 숙제가 지긋지긋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일기 쓰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일기를 쓸 수 있다는 건 내 일상에 시간적 여유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나를 위해 오롯이 쓸 수 있는 그 시간은 더없이 소중해서, 요즘 나는 매일 그 귀한 시간을 받아 들고는 고민한다. 마치 고급 회전초밥집에서 딱 세 접시만 공짜로 먹어도 되는 상황 같다. 도서관에 가고, 운동을 하고, 일기를 쓰는 일에 한정된 시간을 적절히 안배해야 하는 기쁘고 아쉬운 고민이다.


자의로 쓰기 시작한 내 일기는 주로 나 스스로에 대한 끄적거림인 동시에 내가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대상에 관한 기록이었다. 나는 뭔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나와 그 대상에 대해 열렬히 탐구했다. 대상의 어떤 특성이 나를 반응하게 하는지를 소상히 밝히고 싶었던 걸까. 요컨대 나는 일기를 쓰면서 내가 그것의 (혹은 그 사람의) 어디를, 어째서 좋아하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 같다.


요즘 내 일기에는 열에 아홉의 빈도로 내 딸들이 등장한다. 단지 하루의 많시간을 함께 보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아이들이 아기였던 시절에 우리는 거의 하루 24시간을 함께했지만, 당시 내 일기에 그들이 이토록 자주 등장하지 않았었다.(그 무렵 쓴 것은 자기 연민과 자책이 가득한 우울한 일기였다.) 유치원생인 자매는 요즘 나날이 새롭게 갱신되는 듯 신비롭고 경이롭다. 서툴고 이상하지만 스스로 할 줄 아는 것들이 무수히 생겨다. 또한 여기저기서 학습한 언어와 행동 양식들이 얼기설기 내면화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는 때때로 전혀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으로 발현되어서 나를 충격에 빠트리거나 혹은 웃게 만든다. 이 예측불가한 사랑스러움은 내 삶에 기쁨과 슬픔과 생동감을 준다. 최근에 나는, 얘들을 안 낳았으면 어쩔뻔했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그들은 언젠가부터 가랑비처럼 내 삶에 스며들었다.




2023.2.3.


어제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꿈에서 우리 가족은 동남아 어딘가를 여행 중이었고, 야시장 같은 번잡한 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쇼핑에 몰두한 사이에 아이들이 사라졌다. 이윽고 유괴범으로부터 돈을 요구하는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기 너머로 딸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꿈에서도 그토록 감각이 예민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소름 끼쳤고 머리털이 곤두섰으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남편은 우는 나에게 침착하자며, 자신이 돈을 가지고 먼저 가겠으니 연락이 두절되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 범인이 알려준 전화번호인지 계좌번호인지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연신 입으로 되뇌면서 꿈에서 깼다. 내 양옆에 곤히 자고 있는 두 딸을 더듬거리며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주방으로 나와서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는 와중에 그 번호들이 머릿속을 생생하게 맴돌았다. 설마.. 로또..? (나는 평생 로또를 사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꿈 없는 잠을 잤다.



암막 커튼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걸 본 둘째가 나를 깨운다. 이 아이가 언제부터 깨어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 엄마, 일어나. 아침이야.

- 응.(일어나지 않는다)

- 엄마, 나 오늘 짐스가는 날이야. 유치원 늦게 가면 짐스 못 간단 말이야.

- 응. 그래, 목요일이네.. 일어날게.


한번 지각해서 체육 수업에 참석 못한 경험이 있는 7살은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봐 목요일마다 긴장한다.


- 응, 그런데 말이야, 엄마는 무서운 꿈을 꿨어.

- 무슨 꿈?

- 나쁜 사람들이 너희를 데려갔어. 너무 겁이 나서 많이 울었어.

- 진짜? 나도 무서운 꿈 꿨는데!

- 무슨 꿈?

- 꿈에서 엄마가 토를 했어. 브라운 색 토! (나는 이틀 전 급체해서 여러 번 구토를 했는데, 얘가 그걸 보고 놀라서 울었었다.) 이제 토하지 마 엄마..

- 그래 이제 괜찮아, 걱정 마. 아침밥 뭐 먹?

- 1호: 치킨 너겟!

- 2호: 나는 씨리얼!

- 그래 치킨 너겟은 몇 개?

- 1호 : 음.. 세 개.

- 2호 : 음, 나도 한 개만 먹을래!


나는 잠옷차림으로 주방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와서 프라이팬에 불을 올려 기름을 두르고, 우유와 씨리얼을 꺼낸다. 자매는 옷장으로 가서 각자 옷을 고른다. 늘 그렇듯이 누군가 먼저 고른 양말을 가지고 서로 신겠다고 싸운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물건을 언니 혹은 동생이 먼저 집어드는 순간, 그것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은 물건이 된다.


- 어허, 너 원래 그거 말고 다른 거 신으려고 했잖아. 언니가 먼저 골랐으니 양보하는 게 어때? 오늘 너 옷에는 그 양말 보다 니가 처음에 고른 게 더 어울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 기억나지요?


둘째가 시무룩하게 양보하고, 첫째는 신이 났다.

자매가 먹는 식탁 맞은편에 앉아서 나는 사과를 깎기 시작한다. 방금 깐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나머지 사과의 껍질을 벗긴다. 이 아이들은 먹는 속도가 퍽 느려서 나는 오늘도 벽시계를 힐끔거다. 초조함이 다가오고 있다. 9시 13분에 아파트 정문 앞에서 유치원 버스(일명 토끼차)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과를 삼키며 분주하게 아이들의 준비물을 챙긴다. 수저, 물통, 가글, 여분 마스크, 숙제. 이제 머리만 묶으면 된다. 아이가 먹는 동안 나는 둘째 뒤로 가서 조심스럽게 빗질을 시작한다.


- 엄마, 오늘은 어제 그 머리 해주세요. 어제 선생님이 해줬던 머리. 양쪽으로 요렇게 묶는 거.

- 응, 해볼게.


머리카락의 아랫부분은 남기고 윗부분만 양갈래로 묶어 하는, 손재주 없는 나에게는 상당히 도전적인 스타일을 요구하고 있다. 


- 다 됐다!

- (거울을 보며 실망함) 엄마, 이거 아니야. 어제 선생님은 더 위로해서 더 조금만 묶었어.

- 응 그래? 근데 시간이 없는데.. 이제 우리 토끼차 타러 나가야 해. 오늘만 그냥 이렇게 하면 안 될까?

- 엄마, 아진이 엄마는 요런 머리도 잘하고 다른 머리도 예쁘게 하는데, 엄마가 아진이 엄마한테 가서 한 번 배우면 어때?

-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그래 다음에 한번 시간을 만들어보자~


고맙게도 첫째는 그냥 포니테일로 묶어 달라고 한다. 그건 쉽. 빗질을 대충 한 뒤 고무줄을 몇 번 튕기며 뚝딱, 머리묶기를 끝내고 서둘러 이 닦고 외투 입고 나가려는 찰나. 문 앞에서 첫째가 갑자기 뭔가 찜찜한 얼굴로 말한다.


- 엄마, 나 이 바지 말고 다른 바지 입을래.

- (헉, 제발..) 응? 갑자기? 왜?? 그거 예쁜데??

- 이 바지 허리가 좀 커서 짐스할 때 내려갈 거 같애.

- (하아.. 그럼 미리 말하지 그걸 왜) 빨리 갈아입자!!!


오늘도 우리는 집 앞에서부터 아파트 정문까지 뛰어야 했다. 아침에 여유 있게 나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매일 만나는 자매의 친구들과 그들의 부모들과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차에 탄 아이들을 배웅한다. 아침 시간 중 최고로 애틋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약 6시간 후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지만, 한 이틀은 못 볼 것처럼 연신 손을 흔든다. 버스가 출발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치 양쪽 발에 차고 있던 20kg짜리 모래주머니를 떼내고 날아갈 듯 가볍다. 마음속으로 "나는 자유다."를 외치며 뛰어서 귀가한다. 평소에는 운동을 하러 갈 테지만 오늘은 전날의 급체 후유증으로 집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일상을 기록할 여유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다. 금세 휘발해 버릴 감정과, 곧 잊혀질 아이들의 말을 써놓는 일. 이것은 내가 늘 원하일이었다. 여행을 가서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려고 부지런히 사진을 찍듯이, 보통의 일상도 남겨놓고 싶다. 잘 쓰지 않아도 좋다는 기분이 든다.


영원하지 않을 내 아이들과 영원하지 않을 나의 감정이 공존했던 이 평범한 아침이 감사하다. 요즘, 어른들이 하나같이 나에게 했던 그 말의 뜻을 조금씩 알 것 같다. 지나고 돌아보니 그때가 제일 좋을 때더라, 라던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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