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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an 28. 2023

꽃소금을 넣으면 꽃맛이 나요?

아이와 함께 살면

7세가 되어 글을 읽기 시작한 둘째는 요즘 자신을 둘러싼 글자를 모조리 읽어버릴 태세다. 그동안 유치원에서 내주는 한글 숙제를 띄엄띄엄 해가는 걸 보고 이 아이는 문맹의 시기가 길겠구나 여겼었다. 하지만 갑자기 쌓인 둑이 터지듯 한글을 읽는 것이 아닌가. 길을 걷거나 차로 이동할 때 간판이나 표지판을 읽는 건 기특한데, 내가 친구와 카톡을 주고받을 때면 옆에 슬쩍 와서 메시지 내용을 엿보는 통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동안 글밥 많은 책을 읽어줄 때면 내 나름대로 줄여서 읽고 페이지를 휙 넘기기도 했는데, 이제는 아이가 책장을 붙잡고 유심히 보더니 정정을 요구한다.


- 잠깐만 엄마, 그 얘기가 어디에 써있어?

- 음 미안해~ 엄마가 너무 졸리고 목이 아파서 빨리 읽으려고 그랬지~~


나는 자주 무안해진다.


문자를 인식하지만 의미는 해독하지 못하므로 여전히 뜻은 알려줘야 한다. 오늘 읽었던 책에서는 툇마루, 분풀이, 무작정, 나부끼다 같은 어휘들을 설명해야 했다. 툇마루는 이미지를 검색해서 보여주었고 나머지는..쉽지 않았다. 하튼 반전이 있었던 스토리의 결말을 듣자 아이의 눈이 똥그래다.


- 응?? 마당쇠가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착한 사람이었네??

- 맞아,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착한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고, 그런 게 아닐까? 엄마도 너한테 화낼 때도 있잖아.

- 응, 하지만 엄마는 사과를 잘하니까 착해요.

- 그래? 좋게 봐줘서 고마워.


주방에서는 식재료를 읽다가 발. 사. 믹, 디. 포. 리 같은 단어를 궁금해했고, '꽃. 소. 금?!! 꽃소금을 넣으면 꽃맛이 나요?'라고 질문을 해서 나를 웃겼다. 아이와 함께 살면 힘든 일이 많지만 웃을 일도 많다. 




나는 많이 부족한 엄마라서 아이를 살뜰히 챙기지 못하곤 한다. 발레수업에 간 첫째를 데리러 가는 걸 잊어버리고 있다가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가기도 하고, 유치원 준비물도 자주 깜빡한다. '오늘도 엄마가 꼴찌로 왔어요.' '오늘 유치원에서 나만 앞치마 안 가지고 왔어..'라고 아이가 말할 때면 더없이 미안한 마음이지만, 나의 실수는 반복되고야 만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이제 스스로 꽤 잘 챙긴다. 오늘 아침에 첫째는 자신의 등원 가방을 챙기며 '엄마, 어제는 내 숟가락 안 넣었더라, 나 선생님한테 빌렸잖아요. 오늘은 꼭 넣어주세요!'라고 했다.  




매일밤 잠들기 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 우리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1. 오늘 재미있었던 일 2. 오늘 감사했던 일. 하나씩만 말하는 것이 규칙인데 이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 있다. 오늘밤이 그랬다.


나 : 오늘 엄마는 친구 선생님들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서 좋았어. 그리고 오늘도 우리 모두 건강해서 감사합니다. (나는 늘 비슷한 얘길 한다.)

첫째 : 나는 유튜브 보면서 종이접기 한 거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음.. 유치원 선생님이 머리를 묶어주고 나한테 예쁘다고 해줘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둘째 : 언니 내 차례야! 나는 오늘 다해핑 색칠한 거랑 칠판에 우리 가족 이름 쓴 거 그게 재밌었어! 그리고 엄마가 달걀프라이를 두 개 해줘서 감사했어요. 근데 우리 집에 이제 계란 없지 않아 엄마?

첫째 : 나 또 말할 거 있어! 우리 집에 물이 잘 나와서 감사합니다. (어제와 오늘, 유치원 교실 일부에 수도가 얼어서 물이 안 나왔다고 한다.)

둘째 : 나도 한 개 더 있어, 이렇게 엄마랑 안고 같이 자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폭- 안겼다.) 엄마.. 그런데 나는, 계속 어린이였으면 좋겠어. 어른되기 싫어.

나 : 응? 왜?

둘째 : 어른되면.. 엄마 아빠가 죽잖아..

나 : 음..., 꼭 그렇지는 않아, 엄마는 어른이지만 부산할머니랑 부산할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셔.

둘째 : 그런데, 상할머니는 이제 없잖아. 부산할머니는 엄마가 없자나.

나 : 음.. 상할머니 생각났구나.. 할머니는 좋은 곳에 가셨을 거야.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하루하루 재밌게 잘 살면 돼요. 이제 자자 우리.



내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6개월쯤 되었는데, 둘째가 최근에 증조할머니의 부재를 의식한 듯했다. 생전에 외할머니자주 봤기 때문에, 근에 우리가 늘 함께가던 식당에 갔을 때 할머니가 없는 걸 의아하게 여겼었다. 조할머니 얘길 하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진 둘째를 쓰다듬으며 재웠다. 피곤했는지 금세 잠들어서 코를 골았다. 나는 아이들 사이에 끼여 누운 채로 눈을 껌뻑거리며 내 외할머니를 떠올다. 아이와 함께 사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를 키워준 어른이 더 자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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