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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May 18. 2023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야마구치 슈

사교육에 관한 르상티망

자녀가 학령기에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사교육에 관심이 생긴다. 학습 위주의 교육다는 예체능 영역에 주력하고자 하는 나름의 소신이 있지만, 주위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사는 대단지 아파트 앞의 상가는 각종 학원들로 빼곡하고, 내가 아는 아이 친구들은 모두 방과 후에 학원 간다. 같은 아파트의 아이 친구 엄마들과 대화 나눌 때면 대게 이런 질문을 받다.

"솔이 영어학원은 어디 다녀요?"

'시 솔이 영어학원 니나요?'라는 질문이 먼저일 법도 한데, 그렇게 묻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주위를 둘러봐도 영어 학원 안가는 애는 솔이밖에 없는 듯 했다.


음악줄넘기, 방송댄스, 바이올린 등 방과 후 수업만 듣는 1학년 솔이도 쁜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친한 친구들이 모두 학원에 가고 놀 사람이 없어지는 오후 시간에는 연년생 동생과 각종 역할 놀이를 하며 릴없이 시간을 보낸다.(요즘 동생의 존재가 참으로 고맙다.) 아이의 속내가 궁금해서 '친구들 다니는 어학원이나 공부방에 너도 가볼래?' 하고 넌지시 물어보면 고민 없이 싫다고 한다. 이 동네로 이사 와서 어쩌다다소 학구열 높은 유치원 다녔던 아이는, 현재 놀이 위주 학교 일과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언뜻봐도 1학년의 교육과정이 유치원7세의 그것보다 더 쉽다. 유치원마다 다를 수도 있지만.) 유치원 때 매일 해야 했던 영어 숙제와 한글 받아쓰기와 주산암산 과제가 없으니 너무 좋단다.



사교육 시장의 규모가 커지는 현상은 그 강점이 여실하는 반증일 것이다. 공교육만으로는 실력 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교육의 밀착 케어를 통해 보다 일찍부터 아이의 학습 습관을 형성할 수 있고, 선행교육 결과 학에서 학교에서 상위권에 속기 쉽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생기고 자기 효능감 self-efficacy  높아질 것이다. 일단 상위 그룹에 포함되기 시작하면 그 분위기에 힘입어 계속 앞서 나갈 수 있다. 학교에서 좋은 내신을 받고, 학생부 전형으로 좋은 대학에 가고, 전문직을 갖게 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반대급부한정된 시간을 학습 외의 활동에 쓰지 못함으로써 놓치는 기회비용일 테다. 타인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사회성, 자유로운 독서를 통한 범교과적인 지식과 문해력, '해야 할' 것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탐색하는 자발성이나 창의성 같은 가치를 예로 들 수 있을까. 요컨대, 학원 다니느라 바쁜 아이들이 여유롭게 좋아하는 활동(놀이)에 몰두할 시간이 , 이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 부작용이 생긴다는 흔한 지적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과열 교육열 이면에 부모의 불안과 욕망 있고, 그 희생자가 바로 우리 아이들이며, 남보다 우월한 지위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교육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고해야 한다는 개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고유한 기질을 갖고 있으며 처한 환경도 다를진대, 사교육의 장단점을 이런 식으로 단순히 열거하는 것이 온당할까. 요컨대, 학원을 많이 다니는 아이들이라고 하여 반드시 성적이 높지 않고, 사교육을 받지 고 자란 아이들의 자발성과 창의력이 특히 뛰어나지도 않다. 아마도 결정적인 것은 사교육을 대하는 아이의 개인적 성향과 그 아이가 속한 가정 내의 다방면적인 분위기일 것이다.




각설하고,

 글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현상은 전혀 다른 지점에 걸쳐있다. 로 이와 같은 사교육의 정적 측면에 귀를 바싹 기울이고 있는 나 발견한 일 관한 것이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저자 야마구치 슈는 책의 첫 장에서 르상티망 ressentiment 대해 말한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시한 르상티망이란 개념은 한마디로 시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예를 들면, 누군가에 대한 시기심에 그 사람이 소유한 사치품과 똑같은 것, 혹은 그보다 더 값비싼 것을 구매하는 심리이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우리가 시기심이라고 여기지 않는 감정과 행동까지도 포함한 다소 복잡한 감정을 아우른다.


  니체에 의하면 르상티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용기와 행동으로 사태를 호전시키려 들지 않기 때문에 르상티망을 발생시키는 근원이 된 가치 기준을 뒤바꾸거나 정반대의 가치판단을 주장해서 르상티망을 해소하려고 한다.  

  니체는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를 들었다. 니체에 따르면 고대 로마 시대에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유대인은 줄곧 빈곤에 허덕였고 부와 권력을 거머쥔 로마인, 즉 지배자를 선망하면서도 증오했다. 하지만 현실을 바꾸기도, 로마인보다 우위에 서기도 어려웠던 그들은 복수를 위해 신을 만들어 내 '로마인은 풍요로운데 우리는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쪽이다. 부자와 권력자들은 신에게 미움받고 있어서 천국에는 갈 수 없다'는 논리를 세웠다. 니체는 신이라는, 로마인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가공의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강자와 약자를 반전시켜 심리적인 복수를 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열등감을 노력이나 도전으로 해소하려 하지 않고 열등감을 느끼는 원천인 '강한 타자'를 부정하는 가치관을 끌어내 자신을 긍정하려 한 사고관이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p.53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말해왔던 것이다.


나에게 돈이라는 자원이 상당히 한정적이므로 그것을 효율적으로 쓸 필요가 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러기 위해 교육비로 매달 백만 원이 넘는 큰돈을 지출하기는 현실적으로 버겁다. 게다가 나는 아이가 둘이 뭔하나를 하려면 돈이 두 배로 든다. 또한, 사교육이란 세계에서 적정선을 찾기 어렵다는 걸 듣고 보아서 알고, 나라는 사람은 뭔가를 시작하면 그것에 꽤 진심으로 임하는 편므로 일단 시작하면 꾸준한 추가 지출이 생길 가능성이 높. 그리하여 나는 아예 그 영역에 발을 담그지 않기를 선택했다.


뿐만 아니라 나름 교육종사자로서 - 특히 영어교육전공자로서 - 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으며 그 방식에 비해 교육비가 과하다고 느낀다. 나는 그 어마어마한 돈을 학원이나 과외에 지출하며 미래를 도모하기 보다는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 쓰길 선호하고, 여유가 생기면 아이들의 주식계좌에 종잣돈으로 쌓아주고자 한다. 급변하는 시대에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대학이라는 관문이, 학벌이라는 타이틀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며 다방면의 경험과 경력, 자신만의 고유한 감성색깔을 가진 이가 여러 직업을 동시에 갖고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장기투자로 종잣돈을 차곡차곡 불려서 훗날 아이가 유학 가기를 희망하거나 창업을 하고 싶어 할 때 지원해 주는 것이 어쩌면 더 현명하다는 생각이다.


그럴듯한가..?

하지만 나의 논리는 단 하나의 질문에 무너지고 만다.


"그럼 만약에 돈이 무한정 많으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런 상황이라 내 입장은 뒤집어질지도 를 일이다.

'나에게 돈 한정된 자원'이라말한 첫 번째 문장이 바로 명백한 근거일 테다. 사실 나는 충분히 부유하지 못해서 사교육을 포기했다는 것인데, 그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방향을 튼 것이다. 르상티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합리화한 전형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 자기기만몸서리쳤다. 얼마 전에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왜 자녀들을 왜 학원에 안 보내냐는 질문을 받렇게 대답한 일도 끄러웠다.

 

"저는 훗날 제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아예 대학을 안가 더락도 속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건 사실부모 만족 아닐까요? 학교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봐왔지만, 공부 성적이나 입시 결과가 삶의 만족도와 딱히 상관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평소 생각해 오던 것을 입 밖으로 말했을 뿐인데, 그 말을 하고 나서 어째서 한동안 뒷맛이 찜찜했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이솝 우화 속의 여우가 먹을 수 없는 포도를 향'저건 분명 엄청나게 신포도'  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교육, 시키고도 싶지만 경제적으로 부담되서 안하고 있어요.'라고 했으면 될 것을 말이다.


르상티망 자체가 부정적이지는 않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품는 감정이지만,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는 있다. 길에서 크롭탑을 입은 젊은이들을 보며 '추운데 배를 내놓고 돌아다닌다'며 혀를 찼던 건 사실 그 잘록한 허리가 부러워서가 아니었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두른 사람을 보고 '저렇게 노골적으로 돈을 과시하다니 내면이 공허한 사람이로구나' 라고 생각한 것도.


어떤 연유로든 내가 가보지 못한, 혹은 아마이번 생에 결코 가닿지 못할 어떤 길에 대해서는 섣불리 논하는 걸 경계해야겠다는 마음이다. 그 전에 내가 그것에 대해 품고 있는 정직한 감정을 마주 볼 일이다. 스스로 뭔가 찜찜하다면, 거기엔 분명 정당하지 못한 뭔가가 숨어있다. 책을 통해 내 헐벗은 모습을 발견한 귀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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