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시인의 산문집을 읽다가 '우리 안에 머물러 우리를 만드는 것들'이라는 글에 한참 머물렀다.
우리가 본 영화들은 우리를 통과해 지나가지만, 모두 가버리는 건 아니다. 어떤 장면, 어떤 대사, 인물의 눈빛, 목소리, 배경, 음악 그리고 영화를 보던 시간이나 장소,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문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머물러 우리를 만든다.
P.152 <고요한 포옹>
이제껏 내가 본 영화가 몇 편이나 될까.그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 내 안에 머물러 나를 만들었을까. 아득해진다.
엄청난 감흥으로 나를 전율케 했던 영화들을 '인생 영화'라며 회고하기도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엇, 나 이거 봤는데!" 하면서도 정작 내용이 홀라당 기억 안나기도 한다. 그러다가 시놉시스와는 전혀 관련 없는 뜬금없는 것들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 영화 볼 때 내 옆자리 사람이 빅맥버거를 먹어서,나2시간내내 배고팠잖아."라는 것처럼.(그것은 실로 강렬한 냄새였다.)
더 흥미로웠던건이어지는 내용이다.
저자의 경험상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에 관해 친구들에게 질문했을 때, 그들이 들려준 대답이 묘하게 '현재의 그'와 자연스럽게 매칭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관이라는 곳에 난생처음으로 방문한다는 '사건'에는 높은 확률로 누군가 동행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가족, 친지, 친구 등의 친밀한 사람이었을 테고.우리는 좋든 싫든 가까운 이에게 영향을 받는다.극장에서 보기로 선택했던 그영화에는 질문받은 당사자 혹은 동행자의 취향이 십분 반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첫 영화는'취향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내가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를 기억한다. 그건 픽사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였다.수십 년 전 그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가.그날 나는 엄마와 단둘이 외출했다. 약속 장소는 서면이었고, 만나기로 한 사람 엄마 친구와 그녀의 딸이었다. '00 면옥'이라는 식당에서 함흥냉면을 먹고(이 또한 난생처음 먹어 본 음식이었다) 장소를 옮겨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엄마의 친구는 내가 '이모'라고 불렀던 여인이었는데, 내 엄마보다 퍽 예쁘고 세련된 스타일의 미인이어서 나는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들이 딸들을 대동하고 만난 건 처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와 동갑이었던 그 애도 자기 엄마를 닮아 무척 예뻤다. 새초롬한 원피스를 입고있던 걔는 외동딸이라고 했다. 나는 집에 두고 온 내 언니와 남동생을 잠시 떠올렸다. 우리 삼 남매는 티브이채널이나 먹을 걸 두고 툭하면 싸우는데 얘네 집은 평화롭겠다,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각자 제엄마 옆에 앉아있었다. 한동안 낯설고쑥쑥 했는데,서로 눈을 슬쩍슬쩍 마주치며 조금씩 웃었던 것 같다. 친해지고 싶은 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나이였다.
이모가 다정하게 물었다.
-너희들 뭐 하고 싶어?
걔가 말했다.
-영화 보고 싶어. 토이스토리 지금 개봉했어 엄마.
당시의나는 극장에 가본 적도, 토이스토리가 뭔지도 몰랐다. 극장에 상영 중인 영화를 알고 있다니. 자신의 취향을 가진 아이라니. 갑자기 그 아이가 언니처럼 느껴졌다.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
그 애의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엄마들은 근처 극장에 우리를 넣어주었고, 나는 긴장했지만 의연한 척 그 아이를 따라 들어갔다. 아직키가 작아서 그랬는지, 자리가 앞쪽이어서였는지, 우리는 고개를 쳐들고 거대한 스크린을 봐야 했다. 그 와중에 세로 자막까지 읽어내느라 내 감각들은 몹시 분주했다.서서히, 나는 영화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장난감들의 애환과 우정에 감동받아서 울고 웃었다.영화를 보는 동안 내 안의 뭔가가 크게 파동 치는 걸 느꼈다. 극장을 빠져나오며 나는 스스로 조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 후로 토이스토리 2,3,4가 나올 때마다 나는 극장에 갔다. 우디와 버즈, 앤디와 보니.매회 새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저마다 사연이 있고 모두 사랑스럽다.(홍콩디즈니랜드의 기념품샵에서 포키와 개비개비 인형을 보고 반가워 어쩔 줄 몰랐다!)모든 시리즈를 예닐곱 번씩 봤는데도, 마지막 장면에서나는 필연적으로 운다.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건, 어쩌면 이 영화가처음으로 내게 남긴 인상일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니 나의 첫 영화관 동행자는 그닥 친밀한 사람은 아니었다. 초면이었던 우리의 취향이우연히도 비슷했던 것인지, 그 애에 대한 나의 호감이 함께 본 영화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저 토이스토리라는 영화는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확실히 아는 건 내가 토이스토리를 사랑한다는 것과, 그유쾌하고따뜻한영화가 나의 첫극장 나들이 작품이었다는사실이 맘에 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