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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Sep 06. 2023

8살 보리에 관한 모든 것

첫 딸에 관하여

첫 딸의 태명은 보리이다. 

보리는 내게 처음으로 '엄마'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그 역할은 내 자아 정체성을 뒤흔드는 막중한 일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던 시기에는 아의 욕구를 헤아리고 대처하느라 매일 고군분투했다. 엄마가 평생 아기만 돌봐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노동이겠다 싶을 때마다 기는 에 없던 방식의 귀여움을 선보이며 나를 웃게 했다. 치 그 작은 몸뚱이 속에 양육자를 살살 녹일 만한 온갖 재롱과 앙증맞음을 품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씩 꺼내보여 주는 듯다.



아이가 한해 한해 커가며 스스로 할 줄 아는 것들이 늘어났고, 외적으로 나의 육아 노동 강도는 줄어들었다. 초등 1학년이 된 지금, 보리와 나는 꽤 대화가 통한다. 때때로  사실이 울고 싶을 만큼 감격스럽다. 키 125cm, 몸무게 19.8kg의 8살 소녀는 마와 떨어진 낮시간 동안 세상적극적으로 겪는다. 혼자 등하교하고, 보고, 듣고, 짐작하, 흡수하고, 즐기고, 시도해 보면서 저 혼자 세상과소통을 시작. 아이는 독립이라는 이름의 첫 단계를 밟고 있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가 관찰해 온 바, mbti 식으로는 대략 ENFJ 유형의 인간으로 추측된다. 가소성 충만한 어린이이므로 향후에 성향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겠지만, 변하지 않는 기질은 분명 존재다. 지금의 보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가끔 너무 웃기고 기발하고 기막혀서 나는 황급히 노트에 적어두곤 한다. 혹여 그 생생한 말들이 나중에 기억이 안 나서 몹시 안타까워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 보이는 것들에 대해 제대로 기록해 두고 싶다.




1. 보리는 정돈된 상태를 좋아한다.

다시 말해, 틀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몹시 어려워한다. 빨래를 예쁘게 각 맞춰 개키고, 글자를 또박또박 가지런하게 눌러쓴다. 물건을 보기 좋게 배치하고, 그 상태가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기본적으로 손끝이 야무지다. 하지만 규칙을 준수하는 원칙주의자가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가끔 융통성이 부족해 보인다. 보리는 본인은 물론이고 타인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 또한 보고 있지 못한다.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동생이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한 일을 할 때, 보리는 참지 않고 말한다. 좋게 말하면 될 것을 날카롭고 예리하고 표독스럽게 지적한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의 행동을 선생님한테 가서 미주알고주알 이른다.


- 엄마, 오늘 재환이랑 민규가 급식실에서 젓가락을 돌리면서 막 장난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선생님한테 다 이르려고 가고 있었는데, 지아가 갑자기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같이 가자고 해서, 이르는 걸 깜빡했어.


아무래도 1일 1 고자질을 하는 것 같은데, 오늘은 다행히 하루 비껴간 듯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 보리는 불안도가 높은 편이다.

학교가 끝나면 칼같이 엄마에게 전화하고, 내가 약속된 귀가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초조해한다. 엄마와의 애착이 다소 불안정하게 형성된 것 같다. 슬프거나 화나는 일이 있을 땐 "엄마, 나 충전이 필요해."라며 나에게 밀착한다. 그럴 때 우리 모녀는 아무 말 없이 꼭 끌어안고 한참을 가만히 있는다. 아이의 심장박동이 안정적인 박자로 돌아오면 얼굴을 마주 본다. 아이는 그제야 웃는다. 아직 밤에 잘 때도 엄마랑 꼭 붙어서 잔다. 7살 동생이 제방에서 혼자 자기에 자기도 따라 해보려 했지만, 무서워서 안 되겠다며 포기했다. 언니로서 부끄럽고 열등감을 느끼지만 결국 엄마랑 같이 자는 걸 선택했다. 보리는 80살까지 엄마랑 살 거라고 매일밤 말한다.


 때로 아이를 지켜주기도 한다. 신중하여 위험한 것에 가까이 가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미리 준비하여 놓치지 않는다. 분에 학교에서는 반듯한 모범생이다. 융통성은 부족한 모범생.




3. 보리는 주목받고 싶어 한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본인이 주인공이기를 바란다.

보리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있잖아, 그거 알아?" 스로가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첫 번째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친구들이나 동생들과 역할 놀이를 할 때 본인이 항상 주인공이다. 학교놀이할 때는 선생님, 병원놀이할 때는 의사다. 나는 이제껏 보리가 학생이나 환자 역할을 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여 몰래 지켜보았더니, 나름의 수완이 있었다. 동생이 "언니, 나도 선생님 하고 싶어."라고 칭얼대면 보리는 타협을 시도한다. "음.. 네가 학생 하면 내가 이거(평소에 동생이 갖고 싶어 하던 물건) 너 줄게." 하는 식이다. 동생은 대체로 수긍하지만 가끔 받아들이지 않고 우기기도 한다.

-싫어! 언니만 맨날 선생님하고! 나도 하고 싶단 말이야!

그러면 보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한다.

-그래, 그럼 너가 선생님 해. 나는 그럼 교장선생님 할게. 인형들 다 가져와, 걔네들 학생 시키자.

놀이의 서사는 이제부터 교장실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4. 보리는 질투 심하다.

엄마가 동생에게 주목하거나 칭찬하면 보리는 갑자기 화가 나고 슬퍼진다. 지난 주말 오전에 있었던 일이다. 아이들과 수영장에 갔다가 귀가하는 차 안에서 내가 말했다. "우리 코스트코 들렀다 갈까?" 아이들이 좋다고 했고, 나는 문득 둘째가 꿨다는 꿈의 내용이 생각나서 반갑게 말했다. "맞다, 담이가 오늘 아침에 코스트코 가는 꿈 꿨다고 했는데, 신기하게 우리가 오늘 거기를 가네?" 담이는 맞다며 웃었다. 보리는 조용했다. 이윽고 보리가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도 오늘 꿈꿨는데.. 엄마는 내 꿈 얘기는 안 하고... 엄마는 담이만 좋아하는 것 같아ㅠㅠ

하.. 이런 난감한 순간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5. 열정덩어리, 욕망덩어리

보리는 피아노학원을 1년째 다니고 있고, 방과후학교에서 바이올린, 방송댄스, 한자를 7개월째 배우고 있다. 매주 금요일에는 음악줄넘기 수업을, 주말(토, 일)에는 수영 수업에 출석한다. 그녀는 이 모든 것에 열정적이다. 정말이지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다. 제 아빠를 닮아 체육 능력도 우수한 편이다. 두 발 자전거는 배운 지 하루 만에 타기 시작했고, 달리기는 반에서 1등이다. 수영은 현재 자유형과 배영을 마스터한 상태이다. 배움의 속도가 빠르고, 자세가 정확하다고 선생님들에게 늘 칭찬받는다. 지난주에는 한자자격 급수 7급 시험을 치고 왔다. 들여보낸 지 20분 후에 시험장에서 나온 보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나 백점 받을 것 같은 기분이야."


요즘 보리는 아침마다 출근 준비하는 나를 옆에서 빤히 바라본다. 화장하는 모습은 딱히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보리야, 그렇게 자세히 안 봐도 돼. 어른되면 해~


 했더니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자세히 봐야 어른되서 잘하지~~, 엄마! 이 옷 너무 예뻐, 이거 나 서른아홉 살 되면 물려주세요?






이 아이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는 순간들이 있다. 그건 대 내가 스스로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들이었다. 어릴 적 나는 꽤나 경쟁적인 아이였다. 욕심도 많았고, 지는 걸 못 참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무척 강했다. 그로 인해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했다.

스스로의 싫은 점을 내 아이가 닮다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는 스스로와 조금 더 친밀해지는 중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보리마냥 귀여워 보인다.



보리는 사랑스럽다. 때론 이 아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럴 땐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본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입과 움직이는 입술과 호기심에 반짝거리는 까만 눈동자를. 물놀이하느라 볕에 탄 깡마른 팔다리를. 그 가느다란 몸에 붙은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을. 엄마 그거 알아? 할 때의 신난 표정을. 글자를 눌러쓸 때 입술을 오므리는 특유의 표정을. 사랑한다는 말에 한껏 이완되는 아이의 얼굴을.



2023년 늦여름의 아침.

나는 요즘 보리보다 먼저 출근한다. 학교에 도착해서, 보리가 집을 나서는 장면을 우리 집 현관문에 달린 cctv를 통해서 본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우산을 들고, 한 번에 잘 닫히지 않는 현관문을 손으로 한번 더 밀어서 잠기는 걸 확인한 뒤, 아이는 계단을 내려간다. 매일 보는 장면인데도 정말이지 못 견디게 대견해서 눈물이 날 것만 다.


9살에는 어떨까, 10살에는 뭘 또 해낼까..

17살에는 얼마나 키가 커 있을까.


교실에 들어가서 말쑥하게 앉아있는 귀여운 열일곱 살 소녀들을 다. 이 아이들도 누군가의 귀하디 귀한 딸들일테지. 소녀들의 얼굴 위로 보리의 열일곱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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