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 Francia Jan 10. 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

책을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추천사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신형철평론가와 은유작가가 함께 추천했다는 이 책을 나는 집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둘 중 한 사람의 이름만 보였더라도 의심의 여지없이 펼쳤을 것인데 두 분이 동시에 추천했다니!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이들의 접점을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무엇에 관한 것이든 정확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된 텍스트일 거라고 확신했다.





1980년대 아일랜드의 어느 겨울. 30대 후반에 접어든 빌 펄롱은 석탄 야적장에서 일한다. 그는 아내와 다섯 딸을 둔 평범하고 성실한 가장이다. 아내 아일린은 현실적이고 기민한 여자로 빌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야무지게 살림을 꾸린다. 때는 경제 불황의 시기로 도시분위기는 우울하기 이를 데 없 스산한 겨울 날씨가 회색 하늘에 황량함을 더한다. 빌의 야적장에 외상 손님이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석탄과 땔감의 수요가 늘어나는 계절이라 매출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힘든 시기를 조용히 엎드려 버티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사는 빌은 사랑스러운 아내와 예쁜 딸들을 보며 행복하지만, 가끔 공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빌은 아버지가 없다. 아니, 아버지의 존재를 모른다. 빌의 어머니는 미시즈 윌슨이라는 노부인의 저택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중 임신하여 빌을 낳았다. 미시즈 윌슨은 갈 곳 없는 어린 가정부와 아이를 거두어주었고 빌은 큰 저택의 부엌에서 아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는 늘 놀림받았고, 크리스마스에 산타에게 편지를 썼지만 자신이 받고 싶은 선물을 받지는 못했다. 12살 때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져 죽고, 빌은 아버지에 관한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미시즈 윌슨과 저택 농장 일꾼 네드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궁금한 것을 쉽사리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현재의 빌은 아내와 함께 안락하다. 그들은 귀여운 딸들이 산타에게 쓴 편지를 읽고 원하는 선물을 몰래 준비하며 기쁨을 느끼는 부모다. "우린 참 운이 좋지?" 펄롱은 아내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행복감의 한 켠에는 정체 모를 위태로움이 있다. 빌은 길에서 헤매는 어린아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주머니에 있는 잔돈이라도 쥐어주는 사람이고, 아일린은 남편의 그런 면을 고깝게 여긴다. 그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동떨어져있는 기분이다.


강 건너에 있는 수녀원은 소문이 무성한 곳이다. 빌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이 아니지만, 어느 날 그곳으로 석탄 배달을 갔다가 조금 이상한 장면을 목격한다. 몇몇 소녀들과 젊은 여자가 바닥에 엎드려서 걸레를 들고 예배당 바닥을 죽어라고 문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펄롱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제발 자신들을 데리고 가달라고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수녀가 문을 열고 나오자 여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했고, 펄롱은 찜찜한 기분으로 대금을 받아 나온다. 심란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잘못 들어 잠시 방황하는 펄롱. 그는 어쩐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며칠 후 아침, 수녀원의 석탄광에 석탄을 넣으러 간 그는 또 한 번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마주한다.




18세기부터 20세기말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고 아일랜드 정부에서 지원한 시설 '막달레나 세탁소'는 실제 존재했다.


'타락한 여성'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했으나, 성매매 여성, 혼외 임신을 한 여성, 고아, 학대 피해자, 정신이상자,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평판이 있는 여성, 심지어 외모가 아름다워서 남자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는 젊은 여성까지 마구잡이로 수용했고 교회의 묵인하에 착취했다. 동네 사람들은 세탁소의 실체에 대해 짐작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높은 담 안에서 저질러지는 학대에서 눈을 돌린다.

-옮긴이의 글 중-



저자 클레어 키건은 이 사건에 대해 드러내놓고 고발하지 않는다. 사건은 소설에서 하나의 상징적 소재이다. 소설가는 펄롱이라는 인물의 정체성에다가 조심스럽고 정교하게 이 소재를 접붙인다. 펄롱은 쉽게 동요하거나 함부로 나서서 행동하지 않지 않는다. 어떤 사태를 마주했을 때의 그의 태도는 일관되게 조심스럽다. '평범한 마음 한편에서는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나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라는 속마음은 그야말로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미묘하게 화가 난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에서 기인하는 내적 분노이다. 공허하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방황하던 그는 이제 선명하게 자신을 뒤돌아본다. 더 이상 위선 떨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한 기쁨을 느낀다.



결말은 드라마틱하다기보다 시적이다. 명시적인 엔딩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그 이후 펼쳐질 일들에 관해 궁금증이 일겠지만 이 소설은 초지일관 억누르 암시하는 편이다. 마지막 장을 읽고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인가 싶다가, 이내 뒤에 일어날 일들은 필연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와 첫 문장을 읽으며 비로소 그 섬세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단어가 주는 절묘한 감각과 짜임새 있게 직조된 문장.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은근한 여운이 있다. 그 감동은 재독할 때 더욱 짙어진다. 반드시 최소 2회독 해야 하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인간의 가능성이 서사의 필연성으로 도약하는 지점에서 소설이 끝날 때,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하나를 얻게 된다'라고 썼다. 을 읽기 전에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이제 알 것 같다. 펄롱이라는 평범한 인간이 지닌 가능성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넌지시, 그러나 묵직하게 보여준다. 좋은 독서에서는 그런 구원이 종종 일어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쇄>, 구병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