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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Dec 26. 2023

<파쇄>, 구병모

일단 마음먹고 칼을 집었으면, 뜸 들이지 마

그러니까 이 책은 소설 <파과>(2013)의 프리퀄 prequel이다. 파쇄의 주인공은 <파과> 속 ‘조각’의 40년 전 과거이다.

 


조각의 비범함을 알아본 류 그녀를 인간병기로 만들기 위해 냉혹하게 훈련하는 과정이 피비린내 나는 듯 생생하다. 말이 훈련이지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엔 끝나지 않을 것 같이 찌르고 구르고 조르고 할퀴고 쓰러뜨리고 가격하는 일의 반복이다. 이런 종류의 액션은 영화로 봐야 제맛일 것 같지만, 글로 읽는 액션은 독자의 상상력을 무한정 활성화한다는 점에서 무궁무진하다. 몰입한 만큼 여운도 오래간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단연코 구병모 작가 특유의 감칠맛 나는 문장이다. 좋은 문장은 자고로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는 상식을 보란 듯이 깨버리는 사람이 바로 구병모 작가이다. 그의 장황스러운 만연체는 놀랍도록 긴밀하고, 마치 판소리의 구성진 가락처럼 리듬감 있으며 이보다 더 적확한 단어를 고르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만큼 찰지다.



파쇄를 집어 든 덕분에 파과를 재독 했다.

조각이 겪어온 65년의 세월이 다채롭게 기구하다. 일말의 감정도 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방역(청부살인)을 깔끔하게 해내는 행위가 유해하고 섬뜩하다. 사람 죽이는 기계였던 자가 노년에 접어들어 신체적·심적 변화를 감지한다는 설정. 살인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떠돌이 개를 거두는가 하면, 어느 날 마주한 다정한 의 선량한 행동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그 사람이 사랑하는 존재를 구한다는 서사가 클리셰적이지 않은 것. 이 또한 작가 특유의 마력에서 기인한다. 뻔한 서사를 뻔하지 않은 방향으로 견인하는 고도의 스토리텔링과 이보다 더 구체적일 수 없는 상황 묘사는 이야기의 개연성을 증폭시킨다. 이 생에서 결코 내가 겪을 수 없을 일과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랑 비슷한 감정. 소설이 품고 있는 불가사의하게 아름다운 구석에 독자는 공감과 불가해 사이를 쉼 없이 교차한다.


이런 삶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걸까. 소설을 읽는 내내 드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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