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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Mar 27. 2024

<설국>

허무함과 눈의 정취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어디선가 보고 들었던 문장.

바로 이 소설의 첫 문장이었다. 기차에 몸이 실린 채 길고 어두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왔더니 그곳이 설국이었더라, 를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라고 표현한 것이 감각적이다.



폭설이 내리는 일본 어느 온천 마을.

시마무라는 원할 때 언제든 떠나고 머무는 유유자적한 여행자이다. 부모의 유산으로 유복하게 살아온 그에겐 삶에 대한 허무감이 짙게 깔려있다. 이곳에는 두 여인이 있다. 온천에서 게이샤로 일하는 고마코는 시마무라에게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여성이다. 술에 진탕 취해서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찾아오는 고마코 시마무라는 약간 흥미롭게, 대체로는 애처롭게 바라본. 요코 고마코와는 일관되게 대비되는 인물이다. 말이 없고 조용한, 전형적으로 사연 많아 보이는 여자이다. 우연히 요코와 마주칠 때마다 시마무라는 그녀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에 사로잡힌다.


등장인물은 이 세 사람이 전부이고, 플롯에는 기승전결적인 서사가 없다. 문학적으로는 서정적이라 하겠고 세속적으로는 분위기를 꽤나 피우는 소설이다. 이야기가 매력적이라기보다는 자연경관을 표현한 문장들이 주는 심상이 좋았다. 작가 가와가타 야스나리는 설국의 구체적 무대인 니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 온천에 직접 머물며 작품을 집필해 나갔다고 한다.


내 소설의 대부분은 여행지에서 씌어졌다. 풍경은 내게 창작을 위한 힌트를 줄 뿐 아니라, 통일된 기분을 선사해 준다. 여관방에 앉아 있으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어 공상에도 신선한 힘이 솟는다. 혼자만의 여행은 모든 점에서 내 창작의 집이다.

작가의 말 中



그래서인지 자연의 풍광을 묘사하는 그의 언어는 자못 생생하다. 주인공과 작가 모두 여행 중이었기 때문일까, 마치 낯선 지방의 여행기를 읽는 듯 한 부분들이 있다. 눈 쌓인 어느 시골 동네의 정취를 더 느끼고 싶어서 얇은 책을 부러 느리게 읽었다. 눈에 갇힌 채 긴 겨울을 보내는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이 사실적이면서도 아련하게 다가온다. 작가가 마치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쓴다. 회화적 문체가 바로 이런 것일까.


산들이 검은데도 불구하고 어찌 된 셈인지 온통 영롱한 흰 눈으로 뒤덮인 듯 보였다. 그러자 산들이 투명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늘과 산은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
P.41


동양적 미의 정수를 보여준 노벨 문학상 수상작
전 세계인의 감탄을 자아낸 눈 덮인 니가타 지방의 아름다운 정경
순수한 서정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묘사한 일본 문학 최고의 경지



책 뒤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일본 문학 최고의 경지.. 이런 말들에 살짝 압도되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읽어 본 소설이었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커다란 울림 같은 건 없었다. 소설이 쓰였던 전후 세대에 팽배했을 허무감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동양적 미'라 함은 게이샤라는 이미지가 주는 신비로움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아무래도 유복한 주류의 남성이 어린 게이샤 여성(고마코)과 숱하게 교류하고, 곤란한 처지에 놓인 역시나 어린 여성(요코)에게 매력을 품는다는 설정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어떤 매체를 접하든 그 속에서 여성이 그려지는 방식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런 관점으로 고전을 읽을 때 불편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고전까지 가지 않더라도 십 년 전에 만들어진 드라마만 다시 봐도 불편한 장면들이 많다.) 어쨌든 작품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기도 하다.


솔직히 뚜렷하게 생각나는 내용은 없지만, 몇 폭의 그림 혹은 짧은 일본 영화를 감상한 듯한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소설이 오래도록 기억에 잔상으로 남기 마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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