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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ul 10. 2024

소서, 장마 그리고 요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종일 비였다.

7월 7일 무렵부터 약 보름간, 우리는 24절기상으로 소서小暑에 있다. 작은 더위라는 뜻의 소서. 장마가 찾아오는 소서. 소-서- 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 입에서 바람이 스다. 빗소리처럼 싱그러운 소리가 기분좋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 창밖을 본다. 비 오는 날이면 2층에서 보이는 정원의 초록이 한층 무성하다. 이 비를 맞으며 저 나무와 풀들은 한 뼘 더 자라겠지. 자고 나면 자라 있는 존재들은 우리 집에도 있다. 천진하게 잠에 빠져있는 보리와 담이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깨운다. 나는 참치캔을 뜯어 김가루와 버무려 주먹밥을 만들고 달걀프라이를 두 개 구웠다. 자매가 식탁에 앉아 그걸 먹는 동안 차례로 그들의 머리카락을 빗어 묶는다. 비가 오니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 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우산 쓰고 장화 신고 걷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이 젖는 걸 피할 수 없는 일, 장마철의 습기라는 감각을 아이들도 여실히 느껴보기를 바란다. 여름의 얼굴 중 하나는 그런 것이니까. 장화신기 싫다는 담이와 실랑이하는 대신에 가방에 여벌 양말 한 켤레를 넣어 보냈다.




거실 바닥에 앉아서 비가 내리는 것을 하염없이 본다. 이건 멍이라고 불러야 할까.

쏴아- 빗방울이 나뭇잎을 사정없이 때리는 소리. 라락- 물 묻은 바람이 나뭇가지 흔드는 소리.  청량 넘치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창을 활짝 열었다. 방충망도 열어버린다. 해상도가 높아진 바깥의 풍경에 두 눈이 맑아졌다. 습기 가득한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셔본다. 비냄새 풀냄새 흙냄새 나무냄새. 여름의 냄새.

 



이렇게 비 오는 날엔 침대에 기어들어가서 영화 한 편 보고 싶다. 그래 그러자. 단, 아침 요가 수련을 다녀와서. 스포티파이로 Bruno Major의 Regent's Park를 재생하고 외출 준비를 한다. 음악은 분위기를 전환시켜 나를 행동하게 만드는 매직이다. 요가원까지 차를 타는 15분 동안에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매주 화요일에 업데이트되는 김하나 황선우 작가가 진행하는 채널이다. 덕분에 화요일은 내가 가장 기다리는 요일이 되었다. 김하나 작가의 신간을 어제 주문했으니 오늘 도착할 것이다. 아, 오늘밤엔 그 책을 읽어야지. 설레고 기뻐서 혼자 비실비실 웃었다.




요가원에 도착하자 비가 거세졌다.

나는 우산의 물기를 후드득 털어내고 건물로 들어선다. 실내는 적절한 냉방과 제습 덕에 쾌적하다. 창가에는 아로마 인센스스틱이 타고 있다.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창을 살짝 열어두었다. 이곳은 건물의 5층이라 창밖의 빗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백색소음 같은 빗소리를 듣는다. 바깥의 습도 때문에 공기는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타다다닥. 물이 떨어지는 소리. 그것은 건물 외부로 연결된 오래된 에어컨 연통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다. 인센스의 아득한 연꽃향과 그 둔탁한 비의 소리가 희한하게 조화롭다. 한 동작 한 동작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내 숨이 들고 나는 걸 감각한다. 목덜미에서 흐른 땀 한 방울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요가에서 육체는 삶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간이 5개의 층(겹, 껍데기)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빤짜코샤(Panchakosha)라는 이론. 그 첫 번째 층이 바로 육체층이다. 두 번째는 에너지 혹은 기氣를 상징하는 기체층, 다음은 생각과 감정을 일컫는 심체층, 그리고 그 육체 기체 심체를 바라보는 주체인 '의식체'가 네 번째 껍질이다. 내 몸이 내가 아니고, 내 기운(에너지)이 내가 아니고, 내 감정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음 층인 '의식체'이다. 의식체는 다섯 번째 층인 '행복체'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바라봄을 연습함으로써 의식체의 힘을 키울 수 있다.




육체 수련을 하다 보면 온몸에 에너지가 흐르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깊은 호흡이 나디(온몸의 신경 경락)를 통해 온몸 구석구석으로 에너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가 가장 활성화되는 때는 바로 사바아사나를 할 때이다. 모든 동작 끝에 맞이하는 사바아사나는 언뜻 그저 누워서 편히 쉬는 자세이다. 한편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움직임과 함께 발생한 에너지가 몸은 치유하는 과정다. 내가 사바아사나에 이르렀을 때 완전한 휴식을 경험하곤 하는 까닭이. 오늘의 사바아사나도 그랬다. 싱잉볼 소리의 파동이 낮게 동심원을 그리며 가라앉았다. 내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빗소리와 함께라서 더 충만했던 시간.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전날 숙면을 취하고, 아침 식사를 가볍게 하고, 좋아하는 운동복을 꺼내 입고, 요가를 하는 매일 아침이다. 나는 그저 내 몸의 감각에 몰두하고, 이어서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한다. 그러다 보면 긴장이 완화되고, 걱정하던 일은 별것 아닌 일이 되고, 평안함과 안정감이 내 마음속에 들어찬다. 지난 수업시간, "여러분은 행복해지기 위해 무얼 하나요?"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고민 없이 답했었다. "요가를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할 수 있는 일상. 이런 선물 같은 시간이 주어졌음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에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가는 과정, 그 안에서 나를 만나는 여정, 그 모든 순간에 나는 깨어있다. 살아있다는 감각은 싱그럽고, 그 속엔 어떤 희열이 있다. 살아있되 죽은 것 같았던 시기가 있었기에 알 수 있다. 요즘의 날들은 분명 내 인생의 호시절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이 행복감은 앞으로 다가올 내 생의 시간들도 호시절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준다.






집에 돌아와서 씻고 침대에 누워서 넷플릭스로 영화를 봤다.

창을 살짝 열어놓은 채 빗소리를 들으며. 에어컨을 약하게 이불을 덮고. 사치스러울만큼 쾌적한 2시간이었다. 거장 알폰소 쿠론 감독의 영화 <로마>. 어떤 장면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다시 봐도 울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일 거라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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