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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ul 22. 2022

<이동진 독서법>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책상 한켠에는 대체로 책이 쌓여있습니다. 열 권 남짓의, 일정한 방향 없이 겹쳐 놓인 삐뚤빼뚤한 책 탑입니다. 침실의 협탁 위에도 서너 권이 무질서하게 놓여있어요. 주방 아일랜드 위 커피머신 옆에도 네댓 권가량 흩뿌려져 있고요.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이나 공강 시간에 특별한 업무가 없으면 책을 펼칩니다(‘업무를 미루고’라고 해야 맞겠습니다..). 주방에서는 식사를 준비하면서, 혹은 밥을 먹으면서 한 페이지씩 야금야금 읽어요. 집에서 혹은 직장에서, 일정 시간 동안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그것은 쉬이 찾아오지 않는 천금 같은 독서 시간입니다. 한낮의 오수처럼 달달하기 이를 데 없어요. 밤에 잠들기 전에, 새벽에 일어나서, 제 손 닿는 곳에 있는 책 하나를 펼칩니다. 이렇게 틈만 나면 책을 펼치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실은, 책 읽기에 관한 이야기로 책 한 권을 쓸 수도 있겠다는 마음입니다.      


독서는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시간 보내기 방식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재미있기만 하거나 유익하기만 한 것들은 여럿 있지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일은 흔치 않거든요.


‘하지만 재미를 들이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재미를 들이는 과정, 즉 독서의 진입장벽이 높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두 눈으로 빽빽한 활자를 좇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 자체가 고행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제 학생들에게 가독성 훌륭한, 다시 말해 정말 쉽고 아주 재미있는 책(주로 아동·청소년 소설)을 쥐어주곤 합니다.      


“이 책 한번 읽어보겠어? 재미없으면 덮어도 돼. 선생님 믿고 한 번만 읽어보자.”    

  

결과적으로 높은 확률로 실패를 경험합니다. 유튜브, 웹툰, 틱톡, 인스타그램, 게임.. 재밌는 것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책이라는 물성이 밀리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열에 둘 정도는 성공합니다. 의외로 책을 펼쳐본 경험적 계기 자체가 없는 아이들이 있거든요. 혹은 선생님의 호의에 보답하려는 착한 마음에 일단 읽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요. 어찌 됐든, 결과가 열에 하나가 채 되지 않더라도 저는 좌절하지 않고 책 추천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책의 효용을 믿으니까요.     


「이동진 독서법」에 따르면, 책을 재미로 느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단위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화학에서 용액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어요. 불포화 용액, 포화 용액, 과포화 용액이죠. 예를 들어 1리터의 물에 설탕을 100그램까지 녹일 때, 1그램을 녹이든 10그램을 녹이든 처음에는 보기에 차이가 없어요. 포화 용액에 이르기 전까지 불포화 용액일 때는 아무리 많이 녹여도 다 녹아버려서 겉에서 보기에는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100그램에서 조금만 더한 후 유리병을 유리막대로 살짝 긁어주면 결정이 침전된단 말이에요. 그다음부터는 용질을 넣으면 그대로 다 가라앉게 돼요. 그게 과포화 용액인 거죠. 책을 읽을 때의 효과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억지로 계속 책을 읽는 것 같은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넣는 족족 가라앉듯이 눈에 보이게 되는 거죠.      


저의 경우에는 설탕을 100그램까지 녹이기 전에 이미 포화 용액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그 바탕에는 ‘즐거움과 재미’라는 단순하고도 본질적인 이유가 존재했습니다. ‘재능 있는 자보다 노력하는 자, 노력하는 자보다 즐기는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목적과 쓸모와 효용 따위를 염두하지 않은 채 그저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저에게는 읽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이고 위로이며 여행이자 휴식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재밌고 유익한지.     


어떤 책을 펼칠 때마다 저는 시공간이 전환되는 경험을 합니다. 마치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해요.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장미의 이름은 장미」(은희경)의 배경은 뉴욕이에요. 연작소설인데, 그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40대 여성이고 맨해튼의 한 어학원을 다녀요. 저는 대학시절에 뉴욕에 3박 4일 일정으로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그때의 감각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화려함과 빈곤함이 공존했던 그 거대한 도시. 길에서 나던 낯설고 다채로운 음식 냄새, 센트럴파크의 초록색 청량한 공기, 밤이면 아득한 곳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 맨 홀에서 올라오던 하얀 연기.. 소설의 주인공이 뉴욕에 오게 된 사연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지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수한 일들을 겪고 도망치듯 뉴욕으로 떠났을 그가 어떤 마음일지 헤아려보았습니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황보름)를 읽으면서는 어느 고즈넉한 동네에 있는 작은 책방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과 그 공간을 오가는 사람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가득할 책 냄새와 커피 냄새를 상상해요. 일에 치여서 사는 내 삶을 인식하고, 내가 꿈꿔왔던 것도 서점을 여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봅니다. 그 꿈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되짚어보기도 하고요.     


「경찰 관속으로」(원도)를 펼칠 때마다 경찰관인 저자와 함께 사건 현장으로 함께 출동하는 듯합니다. 현장은 대체로 충격적이거나 놀랍거나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안타깝습니다. 작가가 묘사하는 광경이 몹시 구체적이어서 움찔하고 책을 잠시 덮은 채 숨을 고르기도 하고, 마음이 아파서 울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내가 감히 짐작조차 못 할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과, 그것들을 최전선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은 잠시나마 나를 겸허하게 만듭니다.     


이렇듯 책 읽기는 필연적으로 자기 반영적인 과정입니다. 책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는다기보다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나의 내면에 발생하는 현상 그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유의미합니다. 나의 일부분이 반응했고, 그것은 생각과 감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영상매체를 통해서도 유사한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책은 ‘언어’라는 단 한 가지 재료만을 사용한 지적인 세계이기에 고유한 매력이 있달까요. 이동진 작가는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 ‘문학이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보통 언어는 도구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니까요.     




자기 반영성처럼 뭔가 그럴 듯 해 보이는 말을 했지만 사실 고백하자면, 제가 책을 통해 얻은 유익함에는 현실도피적 성격이 짙어요. 어느 정도 타고난 우울적 성향과 스트레스에 취약한 성정 덕분에 사는 일이 버겁게 느껴지는 일이 잦았습니다. 자존감은 추락하고 무력감에 휩싸인 채로 삶의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시절, 책이 저를 구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마치 종교인들이 간증을 하듯이 저는 책 읽기의 효용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책을 펼칠 때보다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잠시 잊어보려고 책을 읽었던 때, 책은 세상의 냉기를 막아주는 안식처였습니다. 사는 일이 숨 막히는 누군가에게 제 경험이 가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꾸준히 요가를 합니다. 요가할 때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내 호흡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호흡을 하지만 호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요. 매 순간 숨 쉬는 걸 의식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하지만, 하루에 1분이라도 눈을 감고 나의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는 행위는 밤하늘의 별빛같이 형형합니다. 하지 않아도 당장 문제 될 건 전혀 없지만, 해보면 알아요.


‘아, 내가 이렇게 숨을 쉬고 있구나, 내 심장이 이런 속도로 뛰고 있구나. 내 몸이 긴장 상태였구나. 이 부위에 통증이 느껴지네. 이 움직임은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구나..’      


책 읽기는 정신을 다루는 요가가 아닐까 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내 삶이 무탈한지, 내 마음은 무사한지, 그래서 나 지금 괜찮은 건지..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됩니다. 삶이라는 길 위를 바쁘게 걷는 우리에게, 그 길이 맞는 길인지, 다른 사람들이 다 가니까 그냥 따라가는 건 아닌지, 다른 길을 못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멈춰서 생각할 시간을 줍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의 세계가 재배열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요.


아래 글을 제가 수차례 필사했던 단락입니다. 삶은 결국 길을 잃고, 길을 찾고, 세계 앞에 홀로 서는 과정이 아닐까요.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어디론가 산책을 나가고 싶은 그런 날입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길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약간 다릅니다. 독서의 어떤 부분은 길을 잃기 위함도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살아가고 성장하면서 정해진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면 중학교에 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다가 조금만 벗어나서 다른 길로 가게 되면 너무나 두려워집니다. 하지만 정해진 길로 가는 사람들이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지요. 정해진 길로 가는 사람들도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독서는 길을 잃는 경험도 만들어줍니다. 진정한 독서는 정해진 길 밖으로 나가게도 만들고 그래서 길 위에만 있으면 안 보이는 것들도 보게 해 줍니다. 길을 일부러 헤매게도 만듭니다. 우리가 살면서 크게 흔들리면 위험하잖아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흔들리는 건, 상대적으로 덜 위험할 겁니다. 그리고 길 잃는 것의 해방감이나 쾌락, 또는 생각지도 못한 이득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 몇 번 가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니스 하면 산 마르코 광장을 말해요.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베니스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 그 뒷골목을 헤맸던 것입니다. 골목들을 헤맸던 경험이 베니스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어떤 책들은 베니스를 여행할 때 산 마르코 광장에 가보라고 하지 않고 좁고 오래된 골목길들을 헤매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독서는 신비스럽게도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길을 찾게도 만들고 마음껏 헤매게도 만듭니다. 그리고 세계 앞에 홀로 서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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