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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Aug 01. 2022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여성은 왜 괴로운가’에 관한 사회문화적 고찰

우울증뿐만 아니라 원인불명의 다양한 신체적 질환을 호소하는 환자 중에는 여성의 비율이 높다. 의학적으로 그 원인을 여성호르몬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생리 전 증후군이나 갱년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왜 유독 여성의 질환을 설명할 때는 남성의 질환을 설명할 때보다 생물학적 원인을 더 들먹이는가? 여성이 남성과 다른 것은 생식기뿐만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가난하고, 더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 처해 있다. 출산 및 독박 육아를 수행하며 사회와 고립되고, 직장으로 다시 복귀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을 남성보다 훨씬 심하게 받는다. 성폭력 및 가정폭력의 위험에 상시 노출된다. 특정한 역사와 문화, 사회 안에서 여성이 처한 구체적인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여성호르몬에서만 원인을 찾는다면 결코 여성 우울증, 나아가 여성 환자가 많은 질환들을 제대로 탐구해 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울증이나 여타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는 수십 인의 여성을 인터뷰한 사례를 해석한다. 그것들은 일견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서사이지만, 그들에게 발생한 일에는 사회문화적 맥락이 선명하게 존재한다.      


저자의 이야기는 가정폭력을 겪고 트라우마를 경험한 자신의 것에서 비롯하므로 진정성이 있다. 그는 우울증 진단을 받고 의사를 찾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들을 기록한다.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석사논문의 주제로 삼아 탐구했다. 전국에서 다양한 인터뷰이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정성스레 글로 엮어 책에 실었다.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 갇혀 폭력을 계속 당하다 보면, 피해자는 상황을 바꾸거나 행동을 변화시키는 대신 자신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쪽을 택하게 된다. 내가 이 상황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거나, 이것은 꽤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거나, 피해자인 나보다 가해자를 옹호하며 불쌍히 여기기도 한다. 오랫동안 고통에 전 사람이 새로운 삶의 태도와 사고방식을 갖기란 매우 어렵다. 사람들은 낯선 행복보다는 익숙한 고통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 우리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재해석할 자원은 물론, 고통 속으로 함께 들어가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눌 관계가 절실하다.     


유아기 때 맺는 엄마와의 관계가 정신병리와 깊이 연관된다고 해서 정신질환을 가족 내의 개인적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위험하다. 너무나 많은 경우의 정서적 폭력이 가족 내에서 발생한다. 이렇게 형성되고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은 상처는 대물림되기 쉽다. ‘분노가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우울’이라고 장형윤 교수가 말했다. ‘우울증의 가족력이란 비단 유전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또한 비단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는 학교에서 일하면서 가족 안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을 자주 봐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 경험이 부족하고, 가족 안에서 끊임없이 나의 쓸모를 증명해야 했던 학생들. 때로는 그것이 공부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공부는 자격을 증명하는 수단이기에. 동기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학업성취도가 우수하지만, 그들의 행복 지수는 전혀 우수하지 않았다.     


가족 내에서 받는 돌봄이 부족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곳에서 돌봄과 애정과 관심을 갈구한다. 이들에게는 연애 관계가 절실할 수 있다. ‘절박한 사람이 까다로워지긴 어렵다. "당장 죽을 것 같기 때문에" 하는 선택은 여러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집착과 통제를 관심과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위험 신호를 애써 무시하며, 폭력이 내재된 관계에 뛰어들기도 한다. 그만큼 이들은 고립되어 있다.’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사랑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사랑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받을 때가 아니라 줄 때,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구원의 대상이 아닌, 구원의 주체가 될 때만이 사랑은 구원이 된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뿐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 동물일 수도 있고, 글쓰기와 같은 행위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 속 노동자이기 때문에 겪는 고단함에서도 비롯된다. 이들에게는 아플 시간도 없다. 학창 시절부터 끊임없이 스펙을 쌓아야 하고, 간신히 들어간 회사 내에서도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경신을 요구받는다. 이제는 '능력뿐 아니라 '몸'도 경신해야 한다. 우리는 일을 잘 해내면서 주식 투자와 부동산 공부도 해야 하며, 매일 헬스클럽에서 바벨을 들고 닭가슴살을 먹어야 한다. 이 얼마나 피로한 삶인가. 성장 중심 사회에서 정해진 루트를 따르지 않는 사람, 망설이는 사람, 아파서 속도가 더딘 사람은 곧잘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다 해내지 못하는 것인데, 이 상태를 병리적으로 본다. 때때로 나는 사람들에게 우울증 약이나 ADHD 약 대신, 이들을 해변으로 보낸 후 트로피컬 칵테일 한 잔을 쥐여주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번아웃 증후군, 공황장애, 우울증, ADHD…. 사람들이 병명을 간절히 원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렇게라도 지금의 고단함을 인정받고 쉬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책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2021, 창비)의 제목처럼 모두가 바쁘고 힘들지만 과중한 업무와 자기 관리를 해내는 상황에서, 이를 버거워하는 나는 끊임없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 나의 고통은 제대로 생활을 관리하지 못한 나의 탓이다. 이때 그나마 속 시원히 나의 고통을 인정해 주고 '잠시 멈춤'을 허용하는 것은 진단밖에 없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는 일이 수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삶이 유독 고됐던 걸까. 내가 유난히 취약한 인간인 걸까. 주관적으로 둘 다 일리가 있긴 하지만,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학생들이건 노동자들이건 누구나 고단하다는 걸 인정한다. 거리에는 정신건강의학과라는 간판이 늘어나고, 우울과 불안을 완화시켜주는 약을 복용하는 지인들이 늘어난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이유들은 끝도 없이 다채롭게 늘어간다.    

 

해변으로 가서 트로피컬 칵테일 한 잔을 마시는 상상을 해본다. 꿈만 같다. 사실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단 며칠만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기’를 하고 싶다. 젠더가 여성이라서 괴로운 일도 많고, 그냥 사는 게 힘든 일도 많다. 몹시 비관적인 태도이지만 삶은 대체로, 아니 많이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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