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산책과 달동네

by La Francia

내일 아침에는 산책을 나가야지, 생각하며 잠들었다.

오늘 뭔가를 많이 섭취했고 운동은 하지 못하였으며 종일 사람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대략 7시간 후 깼다. 주방에서 물 한 컵을 마신 후 운동복을 입고 트랙킹에 발을 집어넣고 집을 나선다. 일기예보에서 강수확률이 70프로라고 해서 우산을 챙겼다. 아침 하늘은 회색빛이고 공기는 습습하다.


이곳 근처에는 나즈막한 산이 있다. 올라가 본 적은 없다. 전에 봐 둔 산책로 입구로 들어가서 산속을 잠시 걷기로 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고, 비가 올지도 모르고, 혼자이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은 불안하서도 설렌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비가 시작된다. 미세한 빗방울이 얼굴에 미스트 뿌리듯 흩날린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산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른다. 엄청 긴 나무 계단이다. 거칠어지는 내 숨소리가 점점 잘 들리기 시작한다. 계단을 다 올라서 뒤를 돌아보니 이미 꽤 높 곳에 올라와있다. 아파트와 도로가 저 리 내려다보인다.


러닝 할 때 사용하는 나이키런 앱을 켠다. 이 어플은 거리를 측정해 줄 뿐 아니라, 이동 경로가 지도상에 기록되므로 산에서 길을 잃을 경우에 도움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갈림길이 나타났다. 표지판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고 내가 택한 방향을 기억해 둔다. 이어지는 좁다란 산길을 따라 걷는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져서 우산을 폈다. 우산 위로 타닥타닥 비 떨어지는 소리와 나뭇잎이 깔린 바닥을 밟는 내 발소리가 어쩐지 리드미컬하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는 길이지만 일단 계속 따라가 본다. 잠시 멈추고 비 오는 숲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신다. 나는 오롯이 자연 속에 있다.


안개가 끼는 듯하다. 빗줄기는 서서히 거세진다. 쏴아- 나무줄기들과 나뭇잎, 흙과 돌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청량하고 시원하다. 우산을 안 가져왔으면 정말 홀딱 젖을 뻔했다. 산길은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계단을 오르는 데 뭔가 작은 것이 펄쩍한다. 흠칫 놀라서 봤다니 개구리다. 개구리를 보다니! 신기해서 다가가자 폴짝폴짝 귀엽게 도망간다.


빗줄기는 이제 정말 후드득 후드득이다. 폭우인가. 계단을 오르다가 흘러 내려오는 빗물에 신발이 젖었다. 더 오르고 싶지만, 이런 비가 계속 내린다면 위험할 것 같다. 낭만이 재앙이 될지도 모르니 이만 내려가기로 한다. 발을 잘 못 디뎌서 오른발이 물 웅덩이에 푸욱 빠졌다. 신발 속으로 물이 들어와서 발바닥이 축축해졌다. 나는 원래 자주 넘어지고, 쉽게 삐끗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놀랍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신중하지 못한 자는 대체로 예상치 못한 일에 덜 당황하는 법. 어쨌든 이제부터 좀 더 조심스럽게 발을 딛으며 내려온다. 아까 내가 당도했던 갈림길이 다시 나타났다. 가만있자.. 올라오면서 왼쪽으로 꺾었으니까, 지금은 내려가는 길이니.. 어느 쪽이지? 방향치는 아까 찍어놓은 사진을 열어본다. 역시 찍어두길 잘했어.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왔던 길로 내려온다. 옆에 누가 있으면 의존하는 편이지만, 없으면 혼자 꽤 잘할 수 있다.


내려오다 보니 비가 조금씩 잦아든다. 왔던 길로 내려오는데 또 갈림길이 있다. 아까는 못 본 길이다. 자신감이 충만해진 나는 모르는 길이지만 한번 가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길을 잃어도 충분히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콘크리트 계단으로 내려가 보니 좁은 골목으로 이어지고 다세대 주택들이 계단식으로 놓여있다. 운전하면서 도로에서 자주 올려다보던 바로 그 산동네이다. 오래된 주택들이 빡빡하게 나름의 질서대로 놓여있다. 멀리서 보면 운치 있어 보이던 그 길을 처음 걸었다. 비 오는 휴일 아침이라 그런지 인적이 전혀 없다. 낯선 장소. 앞에 뭐가 나타날지 도통 알 수 없는 좁은 길의 연속이다. 그 길 양옆으로 색깔도 모양도 사이즈도 가지각색인 대문들이 속속 나타났다. 불현듯 이곳이 꿈속같이 느껴졌다. 처음 밟아보는 길인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했다. 데자뷰?길은 누군가의 집 코앞이기도 해서 조심스러웠고, 약간 무섭기도 했다. 혹여 여기서 납치라도 된다면 구조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이 덜컥 떠올라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내일은 출근해야 하고, 그러므로 오늘은 수업 준비를 해야 한다. 내일모레는 아이들 소풍날이라 도시락을 싸야 한다. 메뉴를 정해서 장을 봐야 하고, 그 김에 주말에 캠핑 가서 먹을 것들도 함께 쇼핑해야 한다. 집에 돌아가서는 이번 주말에 입었던 옷들을 세탁하고, 미처 정돈하지 못하고 나왔던 집 청소도 해야겠지. 아마 싱크대에는 급히 치웠던 접시가 설거지 안된 채로 말라 붙어 있을 것이다.



나는 잠깐 동안 여행을 다녀온 꿈을 꾼 듯했고,

그렇게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서랍을 열었다가

작년 어느 날에 써 놓은 글이 있어 발행해 봅니다.


주로 일상이지만,

가끔 일상에서 붕 뜨는 순간들을

글로 잡아두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낯설어 보이는 그 순간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