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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an 27. 2023

사흘간의 아난티와 이틀간의 지리산(2)

천왕봉에 오르다

지리산에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온몸을 관통하는 달콤 시큰한 근육통 덕분에 이틀간은 집안에서 요양을 했어요. 마침 요 며칠의 바깥날씨는 또 어찌나 추운지. 이 날씨에 천왕봉을 올랐으면 어쨌을까 헤아려보다가 사방팔방 불던 그곳의 칼바람이 떠올라서 몸서리를 쳤습니다. 오늘은 거실 소파베드에 비스듬히 누워 담요를 덮고 햇볕을 쬐며 장석주 시인의 <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지금 당신을 만나>를 읽었습니다. 이 조촐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참으로 은혜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간체로 쓴 작가님의 글이 읽는 내내 편안합니다. 때문에 그 문체를 모방하여 나머지 산행기를 써 봅니다. (아차차.. 저는 지난 10월의 한라산 산행기록도 여태 마무리 못했네요.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리산 장터목 대피소에서의 1월 20일 새벽 5시. 알람소리에 깬 우리는 어두운 불빛에 의지해 말없이 천왕봉에 오르기 위한 착장을 했습니다. 원체 추위에 취약한 저는 상의 6겹, 하의를 3겹 레이어드 했어요. 양말은 2개 신고 발등과 발바닥에 핫팩을 붙였습니다. 수족냉증 보유라 손바닥에도 핫팩을 붙이고 장갑을 꼈어요. 얼굴전체에 뒤집어쓰는 마스크(복면?)를 쓰고 그 위에 털모자와 귀마개까지 착용하니 천하무적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문득 나는 왜 이 시간에 이곳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깊이 생각할 겨를은 없었습니다.


배낭을 들쳐 매고 취사장으로 가서 컵라면 한 사발을 들이켰습니다. 원래 라면 국물은 남기는 편이지만 버릴 곳도 없는 데다가 따뜻한 온도가 좋아서 남김없이 마셔버렸지요. 이제 정말로 눈발이 몰아치는 캄캄한 밖으로 나서야 할 때. 마치 설국열차에서 하차해야 하는 기분이랄까요.



새벽 6시의 어둠을 헤드랜턴으로 밝히며 한 걸음씩 내디뎠습니다. 밤새 내린 새하얀 눈을 차곡차곡 밟으며 올랐습니다. 아이젠의 날이 눈에 콕콕 박힐 때 나던 뽀드득 소리가 깨끗하고 경쾌했습니다.


-1.7km만 가면 돼. 급히 가지 말고 천천히 깨작깨작 걸어라. 나무늘보처럼 일정한 속도로 계속 디뎌라.  


철인이자 아마추어 산악인인 일행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들으며 페이스 조절을 해보았지만 계속되는 오르막에 숨이 차올랐습니다. 두 손으로 바위를 짚으며 기다시피 이동해야 하는 구간도 자주 만났습니다. 상체를 숙였다 들었다 하는 과정에서 무게 중심을 놓치는 위기를 몇 번 겪으며 속도는 점차 느려졌고요. 결국 일행이 제 배낭까지 매고 나아갔습니다. 일출시각이 다가와서 초조해졌나 봅니다. 고마우면서도 자존심이 조금 한 기분이었지만, 배낭을 벗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습니다.



새벽의 어스름이 서서히 걷힘과 동시에 도달한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 오르자마자 세상을 다 얼려버릴 듯한 칼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댔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장갑을 벗었던 몇 초 동안에 손가락이 없어지는 줄 알았어요. 바람이 어찌나 따끔하고 날카롭던지요.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우리는 결국 보지 못했습니다. 안개 자욱한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얼른 정상에서 내려왔습니다. 하산길에 일행은 아쉬워하며 지난번에 본인이 그곳에서 봤다는 일출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지요. 그의 말을 들으며 전날 산을 오르면서 보았던 풍경들이 역순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어요. 눈이 쌓인 두께가 점차 얕아지고,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쌓아놓은 돌탑들을 다시 만나고, 이른 아침 등산을 시작한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스쳤습니다. 일면식이 없지만 누군가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했고 수고 많으십니다, 안전 산행하세요 라 덕담을 주고받았습니다. 길고 지루한 하산길에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중이었지만, 땅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되었을까. 이 힘든 산행을 왜 하는 것일까. 앞으로 우리는 또 어떤 곳을 가게 될까. 점심은 무얼 먹을까. 여기서 가까운 사우나는 어디인가. 따위의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며 중산리 안내소에 도착했습니다. 다음에는 꼭 일출을 보자는 일행의 말에 저는 한번 와 본 것으로 족하다고 답했습니다. 두 번째는 더 좋다며 연신 감언이설 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렸지만, 고마운 마음은 컸습니다. 당신이 없었으면 나는 결코 완등할 수 없었다는 말로 그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쉬이 잊기 어려운 기억이 될 것입니다. 겨울 지리산의 차가운 공기와 거칠어지던 내 숨. 끝없이 스쿼트를 하는 듯 타이트해지던 하체의 긴장감. 대피소의 뜨거웠던 온돌 바닥. 화장실에서 나던 엄청난 냄새와 변기 속 공포의 심연. 인간의 연약함과 자연의 의연함. 그리고 그 추운 취사장에서 먹었던 삼겹살과 김치찌개! 너무 맛있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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