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해발고도 1653m에 위치한 지리산 장터목대피소. 현재 시각은 오전 1시 14분. 4시간 정도 자다가 문득 깼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얕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꾼 꿈에서 어째서 우리 반 아이들이 죄다 등장했는지 의아하다. 꿈속에서 나는 방학 중 학교에 출근한 상태였고, 스무 명가량되는 우리 반 애들이 우르르 학교에 왔다. 웃긴 건 그 얼굴들이 눈물 나게 반가운 와중에 그 아이들의 이름이 바로 생각이 안나는 것이었다. 평소처럼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설단현상을 겪는 듯 입 끝에 맴도는 이름들을 버벅거렸다.
- 얘들아, 너희들을 너무 오랜만에 봤더니 샘이 이름이 기억이 잘 안 난다ㅜ 미안해. 늙어서 그러니 이해해 주라.
민망함과 미안함을 노화의 설움으로 무마시키고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로 꿈은 끝났다.
우리 반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한 달 전이다. 겨울방학이 시작된 이후 나의 일상은 거의 대부분 운동과 여행이다. 매일 수영장과 피트니스센터를 출석하고 격일로 요가수업을 듣고, 이곳저곳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며 붕괴직전이었던 나의 심신이 회복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번주는 어쩌다 보니 이색적으로 비교체험 극과 극 버전의 여행 - 월화수는 호캉스, 목금은 지리산 일출산행 - 중이다. 아난티 기장에서 2박을 한 뒤, 목요일에는 남해고속도로 순천방향을 타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같은 날 오후 2시에 중산리 탐방 안내소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악 4시간 끝에 이곳 장터목 대피소에 당도했다.
30대가 된 이후로 등산을 좋아했다. 체력이 월등히 좋은 편은 아니지만 나름 힘든 코스의 산행을 즐겨왔다. 내 한계를 마주하고 혹여 그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물러설 곳이 없는 곳에 나를 데려다 놓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상황을 겪게 하는 다소 가혹한 방식으로. 성취감 획득과동시에 내 밑바닥과 잠재력을 동시에 관찰하는 복합적인 애증의 행위라 말하고 싶다. 산에서 흘린 땀과 눈물과 콧물로 점철된 순간들을 내 몸은 기억한다. 그것은 처절하기도 아름답기도 하다.(글로 쓰니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매 산행 후 맛있는 걸 먹으며 감탄해서는 미간에 주름진채로말한다. "나 이거 먹으려고 등산하는 거잖아!")
가을의 영남알프스를 사랑하고, 지난 10월 수학여행에서 한라산 성판악코스도 무난하게 완주했다. 지리산은 난생처음인데, 과연 듣던 대로 가팔랐다. 경사가 얼마나 급한지 5킬로 정도 거리를 올랐는데 해발 1650m였다. 무엇보다 이 계절에 가장 힘든 건 역시 강추위였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중간중간 멈춰 서서 핫팩을 새로 뜯고, 귀도리를 장착하고, 마스크로 얼굴피부를 보호해야 했다.
장터목 대피소에 체크인하자마자 내 몫으로 주어진 공간에 몸을 뉘었다. 이곳의 침상은 티브이에서 보았던 군대 내무반처럼 생겼다. 개별 공간은 약 60 × 180센티 정도에 불과하다. 모포 대여 서비스는 코로나 이후 사라졌으므로 개인 침낭을 가져오지 않으면 그냥 맨바닥에 외투를 덮고 자야 한다. (현재 여기 계신 열댓 명이 대부분 그렇게 잠자고 있는 중) 취사는 가능한데 식수대가 얼어서 나오는 물이 없다. 취사장이라 쓰여 있지만 싱크대는 없고 화장실에도 세면대는 없다. 그러니까 세수와 설거지 같은 건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세상에.
감사하게도 매점에서 생수와 햇반을 판매 중이다. 생수 2리터를 사서, 개인이 챙겨 온 버너와 코펠로 물을 끓여 뭔가 먹을 수 있다. 그러니까 겨울에 이곳에 오려면 부피 작고 간단한 취사도구정도는 필수인 것 같다. 하지만 최대 난제는 역시 화장실이다. 산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재래식 화장실인데, 이곳은 그 향기가 유독 강렬하다. 들어가려면 깊은 심호흡과 큰 각오가 필요하다. 무서운 영화를 굳이 보는 심리로 변기 안을 들여다봤더니, 저 아래 깊은 곳에 인간의 흔적이 다양하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똥에 빠져 고통받는 죄인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아득해졌다.
이 순간 어제까지 힐튼호텔에서 누렸던 안락함과 호사스러움이 극명하다. 한겨울에 온수풀에서 마음껏 수영을 하고 노천에서 온천을 하였으며, 산해진미를 먹고 고급베딩에서 꿀잠을 잤는데. 지금은 등산객들의 발냄새가 큼큼한 남녀공용 대피소에서 타인의 코 고는 소리와 방귀소리를 들으며 침낭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짧은 인생이 참으로 다채롭기도 하다.빛나는 순간도 쓰라린 시간도 모두 끌어안고 긴 호흡으로 나아가라는 임경선 작가의 글귀가 떠오른다.
영상 0도쯤 되는 취사장에서 일행이 가져온 삼겹살을 구웠다. 김치도 야무지게 챙겨 와서 삼겹살을 넣고 김치찌개도 끓였다. 식탁도 의자도 없는 곳에서 선 채로 식재료가 익는 즉시 입으로 넣었다. 식사라기보다는 연료보충이었다. 하지만 지글지글 구워진 삼겹살이 입에 들어온 순간, 암흑 속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오는 듯한 감동이 있었다. 추위도 잊어버리고 나도 모르게 둠칫두둠칫 거리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단언컨대 오늘 여기서 먹은것은 내생에 최고의 삼겹살이었다.
물티슈로 얼굴을 닦고, 로션을 바르고, 양치질은 그냥 포기한 채로 누웠다. 낯선 공간에서 잠이 안 와서 밀리의 서재로 김훈의 하얼빈을 조금 읽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때문에시국의 아픔과 슬픈 민족사가 좀처럼 와닿지 않는다. 안중근이 살았던 시대에도 지리산 천왕봉을 올랐던 이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채비를 하고 천왕봉으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뭇 비장해진다. 어서 좀 더 자 둬야 하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 졌다. 아 이 깜깜한 새벽에 그 화장실에 또 가야 하다니..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