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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r Jade Jan 11. 2020

Dear.Jade_친애하는 나의 할머니께

또 다른 제이드에게,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이 전해지길.


서른세 살.

적지 않은 나이에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가족사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무료로 책을 만들어 준다.

남들이 보면, 한심하다고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홍콩계 대기업에서 적지 않은 연봉을 받다가 나와서 이렇게 사진을 찍고 있는 걸,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내가 마블 영화의 전작들을 보지 않고 어벤저스를 처음 볼 때, 

'이 유치한 걸 사람들이 왜 재밌다는 거지?', '인피니티 스톤이 도대체 뭐길래?' 하며 그 세계관을 전혀 이해 못했다. 영화의 배경과 중요한 요소들을 이해해야 그 영화가 보이듯,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마블영화의 '인피니티 스톤'만큼 

내 인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바로 '할머니'이다. 






젊어서부터 맞벌이를 하셨던 우리 부모님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나는 할머니에게 맡겨질 운명이었다. 

그렇게,

나와 할머니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랐다. 

'장남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를, 

할머니께서 금이야 옥이야 키워주신 건, 

'82년생 김지영'에게는 미안할 일이지만 어찌 보면 그 시대의 '할머니'에게는 조금은 당연한 모습이었다.

방학 때만 되면 할머니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 밥상머리 앞에서도 게임기를 붙들 수 있었던 무한한 자유는,

다 그 시대의 할머니 덕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일이 터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지위가 그런 감정을 강요하는 것도 같지만,

당시 나는 내 또래 남자애들과 다를 바 없이(*적어도 내 친구들은 그랬다) 어중간한 수줍음이 부쩍 늘었고, 어중간하게 우쭐거리는 법도 터득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우리 엄마가 학교 정문에서 울고 계셨다.  

멀리서부터 걸어가며 왠지 모를 불안감에 다른 사람이겠거니 되내어봤지만, 우리 엄마가 맞았다.

울고 있는 엄마가, 학교 앞까지 찾아온 엄마가, 

친구들 앞에서 왜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엄마! 여기서 뭐해? 학원 끝나고 집 갈 테니까 집에서 봐요!"라며 황급히 친구를 따라 나가던 내 뒤로, 

엄마는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그렇게 몇 년 동안 모습을 감추셨다.


무너진 세상에서 내가 숨어들 곳은 할머니의 다락방이 유일했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자신의 세상으로 기꺼이 데려와 주셨고, 그 덕분에 할머니의 세상에서 나는, 

불안한 안정감에 기대어 유년시절을 위태로우면서도 아늑하게 지나올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긴 흘러 나도 대학을 갔다.

사실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던 수능이었지만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군대 포함 6년 동안은 '대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남들과 같은 사회적 시선을 받겠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만큼 나는 (겁쟁이면서도) 내가 가진 생채기를 남몰래 아파했다. 그리고 그 아파하는 모습을 할머니는 고스란히 함께 아파해주셨다. 그 덕에 상처는 점점 아물어가고,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계속 돋아났다.


그러다 군대에서 할머니께 감사함을 표현할 기회가 찾아왔다. 

여느 때처럼 일과를 마치고 복귀하는데 생활관 1층 게시판에 새로 붙은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국군 장병 감사 글쓰기 공모전'이라고 붙은 포스터였는데, 그냥 보자마자 할머니가 떠올랐다.  

밤마다 연등(저녁 점호 이후 자습실 이용) 신청을 하며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글 솜씨와는 무관하게도 진심이 전해졌는지 예상하지 못한 수상을 하게 되었다.

이거 상을 받고 봤더니 꽤나 큰 공모전이었다. 부대장님 표창에 포상휴가까지 얼떨결에 받았는 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뻤던 게 '책'이었다. 여러 수상작들이 엮여 출판된 책이었는데, 포상휴가에 맞춰 그 책을 들고 집으로 향하던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할머니에게 책을 살며시 내밀면서 무관심한 듯 딴청을 피웠다. 할머니께서는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책을 펴놓고 돋보기를 가져와 한 글자, 한 글자씩 읽어 나가셨다. 글을 잘 쓸 줄 모르셨고, 읽는 것도 뜨문뜨문하셨기에,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다.  

한참이 흐르고 내가 쓴 글을 다 읽으신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시며 너무나도 활짝 웃어 보이셨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기쁘다고 했다.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시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내가 부대에 복귀하고 나서도 틈만 나면 돋보기를 들고 앉아서 내 글을 매일매일 읽어보셨다고 했다. 






전역 후 시간이 많이 흘러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해, 그 설날. 

나는 우연히 할머니와 마주 앉아 할머니 몰래 휴대폰 녹음 버튼을 눌렀다. 

왜 녹음을 하고 싶었는지, 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 뭔가 강한 끌림이 있었던 것 같다. 


제사상 차리기 바쁘다는 할머니를 기어코 앉혀두고,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유년 시절은 어땠는지, 

할머니의 첫사랑은 누구였는지, 

할머니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할머니께서 할머니의 아들 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등등


약 3시간가량을 할머니와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며 그 이야기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내가 모르던, 아버지와, 삼촌들과 심지어 고모조차 모르던 할머니의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위안부에 끌려가실 뻔했다가 탈출한 이야기, 대구에서 기차 타고 물건을 떼와서 팔았던 이야기, 어린 시절의 할머니 자신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생을 마감하면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 등이 담겼다. 


그렇게 설날이 지나고 정정하시던 할머니께서는 그 해 6월, 우리 곁을 갑자기 떠나셨다. 

장례를 치르고도 시간이 조금 흐른 초가을, 

할머니와의 육성 대화 내용을 7편의 음성 파일로 편집해 아버지와 삼촌들, 고모께 보내드렸다. 

모두들 눈물을 흘리셨고, 값으로 메길 수 없는 거라 하셨다. 

 





이처럼,

할머니를 둘러싼 여러 잔상들이, 

32살의 나에게 카메라를 들도록 만들었다.

거리를 나서게 만들었고, 사진으로 기록하게 만들었다. 

다른 수많은 가족들과 이런 경험을 나누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그 동안은 도대체 뭘 하고, 왜 32살이나 되어서야 지금 이렇게 카메라를 들었을까.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현실에 부딪혀서 방황하고 순응하던 때부터, 결국 마음에서 시키는 일을 하기까지, 

그 고민의 과정들을 풀어내고 공유하고자 한다. 







Dear. Jade. 

친애하는 옥귀 할머니께. 

언제나 진심을 담아 살아가는 순간들을 정성으로 기록할게요. 


이 세상의 수많은,

또 다른 Jade에게,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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