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ar Jade Jan 15. 2020

희망의 불씨를 나눠 들고 있는 사람들

원 없이 자원봉사 활동해보려고 떠난 길바닥 여행기 (7)



라다크에서 벗어나 우리는 인도 사람들조차 거의 들어본 적 없다는 ‘틸로니아’로 향했다.

가는 길이 막막하고 갈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지만 틸로니아에 있는 ‘맨발대학’을 찾기 위해 짐을 꾸렸다. 맨발 대학 관계자에게 겨우 전화를 해 알아보니 ‘자이푸르’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거의 유일하다고 했다. 그 열차마저도 사실 불확실했지만, 이 불확실성이 왠지 모르게 끌렸다. 그래서 무작정 자이푸르행 버스에 올라탔다.


도시 곳곳의 외벽이 핑크빛이라 핑크 도시로 불리는 자이푸르는 라자스탄 주의 주도이자 교통의 허브였다. 여유 있게 자이푸르에 도착해 기차표를 끊고 구경도 좀 할랬는데, 내 착각이었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인도였고, 자이푸르행 버스는 약속시간을 지켜주기는 커녕 제 때 출발하지도 않았다. 역시나 예상시간을 훨씬 지나 어둠이 핑크빛을 뒤덮은 밤이 돼서야 버스에서 내렸다. 내일 맨발대학으로 갈 기차표를 사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기차표 예약사무소가 이미 문을 닫은 상황이었고, 아직 숙소도 구해둔 곳이 없었다.  

 -

"저기, 릭샤 아저씨!"

버스에서 내린 우리 일행을 보자마자 한 릭샤꾼 아저씨가 다가왔다. 가이드북에 적힌 게스트하우스를 말하니 문제없다며 어서 타란다. 뭔가 찜찜했지만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는 생각에 릭샤에 올라탔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앞자리에 자기 친구 한 명을 태우는 게 아닌가. 인도를 여태껏 여행하면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러려니 하기엔 계속 둘이서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기차 티켓 때문에 미처 신경을 못썼는데, 아차 싶었다. 재빨리 지도를 펴 들고, 릭샤가 가는 방향을 손으로 짚어 가면서 위치를 잡았다. 여행하면서 지도 보는 기술이 엄청나게 늘었던 터라, 어디를 가도 지도만 있으면 살아 나올 자신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요청한 장소와 다른 방향으로 릭샤를 몰고 있었다. 일단은 침착해야 했다. 섣불리 반항하다가 더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잠시 후, 릭샤꾼과 그의 친구는 텅 빈 건물 앞에서 릭샤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

"마이 프랜드! 지금 그 게스트하우스가 공사 때문에 문을 닫은 거 같아. 내가 아는 저렴한 곳이 하나 있는데 그쪽으로 가자!"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다' 싶었다.

재빨리 릭샤에서 뛰어내리며 대꾸했다.

"그럼 우리가 알아서 숙소를 찾을게. 신경 쓰지 마."


릭샤 값을 두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길로 달렸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우리를 따라왔다.

"숙소까지 태워줄게, 어서 타! 여기엔 숙소 없어, 어서 타라고!"

끈질기게 따라붙어봤자 이미 헛수고였다. 우리는 이미 큰길까지 나와 있었고, 일부러 괜찮다고 큰소리를 치자 무슨 일인가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렸다. 그러자 아쉽다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다 휑하니 가버렸다. 아찔했다. 숨어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서둘러 근처에 있던 아무 숙소로 무작정 들어갔다.  다급히 들어간 숙소는 기대 이상으로 너무 아늑했다. 주인아저씨 두 분 모두 상냥했는데, 그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인터넷으로 기차표까지 알아봐 주셨다. 다행히 우리가 탈 기차는 다음날 새벽으로 별도의 예약 없이 현장에서 직접 표를 끊으면 되는 기차였다.  

새벽 기차까지 남은 5시간. 먹고 잠자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답사 준비를 한번 더 했다.

모든 게 부족한 것 투정이었지만, 적어도 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는 더 이상 부족하지 않았다.



-

스산한 거리 위로 인도의 소와 개들이 활개 치는 새벽 4시.

릭샤꾼도 모두 잠든 시간이라, 숙소에서부터 자이푸르 기차역까지 1시간을 걸었다. 겨우 새벽 6 시행 기차를 끊고 승강장 앞에서 틸로니아행 기차를 기다렸다.

"짜이 사세요! 짜이 사세요!"

잠시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신 짜이 한 잔에 온 몸의 노곤함이 확 풀렸다.

처음 타보는 인도 기차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번호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낡은 좌석을 한 엉덩이씩 차지하고 앉았다. 여행자들이 거의 탈 일이 없는 구간이었는지 주변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끊임없이 "어느 나라 사람이야?" "어디로 가?" 등을 물어왔다. 틸로니아로 간다고 하자 "틸로니아? 틸로니아가 어디야?"라며 되려 우리에게 되물었다.

'뭐야 그 정도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야?'

그나마 몇몇 사람들이 알아줘서 진짜 다행이다.  

 -

자다 깨기를 반복하고, 묻고 또 묻기를 반복해 예정보다 2시간 밖에(?) 늦지 않고 틸로니아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틸로니아 역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기차역을 빼고는 허허벌판에 주위 사람들은 우리를 외계인 쯤 되는 듯, 두 눈 휘둥그레지게 쳐다봤다. 너무 배가 고파서 뭐라고 좀 먹고 싶은데 그 흔한 역 앞 식당조차 없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한참을 서성거리자, 주변에서 머뭇거리던 한 아저씨가 다가왔다.  

"저 혹시, 어디 가는 길이예요?"

"아, 저희 '맨발대학'이라는 곳을 찾아가려는데, 혹시 아시나요?"

"아 저도 가는 길이예요. 따라오세요!"

진짜 천만다행이었다. 따라가면서도 여기가 길인가 싶을 정도였으니, 이 분을 못 만났으면 무슨 재주로 찾아갔을까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맨발대학에서는 커뮤니케이션 부서의 ‘람 니와스’ 아저씨께서 나와 우리를 반겨주셨다. 가장 먼저 우리를 위해 특별 인형극을 선보여 주셨는데 맨발대학의 역사를 소개하는 인형극이었다. 인형들은 우리와 대화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풀어갔고, 생각보다 진짜 재밌어서 많이 웃었다.

인형극이 끝이 나자 아저씨께 물었다.

“정말 대단해요 아저씨! 언제부터 이걸 배운 거예요?”

“난 22살 때부터 25년째 맨발대학에서 일했단다. 처음 5년 동안은 회계사로 일하다가 그 후로는 커뮤니케이션 부서로 옮겨와 그때부터 계속 인형극을 하고 있지. 좀 더 재밌는 일을 하고 싶었어. 난 인형극이 정말 좋단다. 인형극을 통해 사람들에게 쉽게 우리가 하는 일을 홍보하고 함께할 사람들을 만들어 가니까.”


아저씨는 센터 곳곳을 함께 다니며 맨발대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해주셨다.

“수십 년 전에 이 곳 틸로니아에 ‘벙커 로이’라는 사람이 왔단다. 그가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카스트 계급이 낮은 주민들에게 수동펌프를 제공하는 거였어. 그는 펌프 보급을 시작으로 점차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 내며 건강, 그리고 교육으로까지 활동을 넓혀가기 시작했지.”

“아무리 그래도, 지역 주민들이 함께 맨발대학의 활동에 동참할 거라 판단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리고 동참한다고 해도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할 일은 극히 제한적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그는 묵묵히 해냈단다. 아무리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지혜와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 게다가 그들은 글만 배운 사람들과는 또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어. 이론은 없지만 실질적인 경험이 그들에겐 있단다. 그리고 맨발대학에선 누구에게나 묻고 배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어. 쉽게 글을 익힐 수 있도록 도서관도 마련했고 말이야. 이런 지원을 통해 그들에게도 '이제 우리도 할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어.”

- 





아저씨를 계속 따라다니며 우리는 생리대를 만들어 인근 도시와 병원에 판매하는 작업장을 구경했고, 치과 의사에게 치료받는 한 아주머니를 만나 볼 수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의사가 와서 치료를 해줘요. 다른 도시에 치과는 보통 한번 가면 500루피의 비용이 드는데, 여기선 50루피에 치료를 받을 수 있거든요. 게다가 마을 아이들에게 올바른 양치법도 교육시켜준답니다.”  


다음으로 아저씨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태양열 기술 부서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프리카 사람들이 와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놀란 표정을 짓자 아저씨는 맨발대학에서 6개월에 한 번씩 티베트, 부탄, 아프리카 등지의 마을 여성을 데려와 교육을 시켜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교육을 받는 그들은 상당히 진지해 보였는데, 그중 탄자니아에서 온 ‘파미아 주마 하지’ 아주머니는 아주머니가 사는 마을 근처에 맨발대학과 관련된 단체가 있어서, 자주 들렀다가 마침 기회가 생겨 지원하셨단다.


“아주머니, 태양열 기술을 왜 배우러 오셨어요? 배우니까 어떠세요?”

“너무 좋아요. 6개월 동안 열심히 배워서 다시 탄자니아로 돌아가 이 기술을 저도 가르치고 싶어요. 재료만 구입한다면 탄자니아에서도 굉장히 유용한 기술이 될 거예요. 어서 잘 배워서 가르칠 수 있었으면 해요.”

20명 남짓 모여 있는 아프리카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 

마지막으로 편집실의 영상 편집자, ‘바타 부르지’ 누나를 만났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맨발대학에 있었단다.

“우리 부모님 모두 맨발대학에서 일하셨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수공예품들을 디자인하시는데, 지금도 일하고 계세요. 제 사무실에 걸려있는 저 깔개도 어머니께서 디자인하신 거죠. 아버지는 사진,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일을 하셨는데, 올해 1월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맨발대학에서 그때 사고로 6명의 사람들이 돌아가셨지요. 그 후 설립자인 ‘벙커 로이’ 아저씨께서 제게 직접 아버지가 하던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죠.”

“그럼 그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이 일을 하기 전에 전 공부를 했었어요. 전공은 역사학, 사회학, 미술이고요.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 영상 편집에 대해선 하나도 몰랐어요. 하지만 맨발대학의 시작이 그렇듯,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벙커 로이’ 아저씨는 제게 기술이 있는지 없는지는 묻지 않았고, 단지 '이 일을 할 수 있겠어요?'라고 물어보셨어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답했죠. 세상에 못할 건 없으니까요. 그렇게 일을 시작하면서 편집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대답은 다부졌고 당당했다.

“그럼 지금의 일에 만족하세요?”

그녀에게는 필요 없는 질문 같았지만, 그래도 물었다.

“그럼요. 난 아주 만족해요. 사실 제 친구들은 다들 저를 이해 못해요. 거기서 뭐 하냐고 그러죠. 저는 거의 최저시급을 받으면서 일하거든요. 그렇지만 제게 돈은 중요하지 않아요. 맨발대학에서도 '돈을 원한다면 여기서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러 나가라.'라고 말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사회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면 여기서 일하라.'라고 하죠. 저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위해 일하고 싶어요. 맨발대학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지식을 배울 기회가 있어요.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죠. 내가 오늘까지 편집 일을 하고, 내일부터 인형극을 하고 싶다고 하면 그들은 내가 일을 바꿀 수 있게 해 줘요. 그렇기 때문에 저뿐만 아니라 누구나 만족스러운 일을 찾고 또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내친김에 그녀에게 카스트 제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인도에 온 이후로 카스트 제도에 대해 묻기가 굉장히 조심스러웠지만 그녀에겐 왠지 물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카스트 제도가 법적으론 폐지가 됐잖아요. 그래도 아직 인식이 변하진 못했고 차별이 계속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길에 지나가는 사람이 어떤 계급인지 어떻게 알고 차별을 하는 건가요?”


“좋은 질문이에요. 바로 직업이에요. 직업과 또 가문에 의해 차별이 자행되고 있지요. 또 그 사람의 걸음 거리나 외모, 복장으로도 지레짐작해버릴 때도 있고요. 특히 이 곳, 라자스탄주는 카스트 제도가 엄청 심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직업이 변하기도 하고, 결혼을 통해 가문의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예상 질문이었다는 듯, 그녀는 곧장 답했다.

“맞는 말이죠. 하지만 결혼 상대를 같은 카스트 등급 안에서 골라야 한다는 거죠. 정말 그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직업으로 사람의 고귀함을 평가할 순 없어요.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고귀하거든요. 카스트제도가 완전히 없어지면 다들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 

늦어도 25살 즈음에 결혼하는 인도 여성과는 달리 32살의 그녀는 아직 미혼이었다. 카스트 제도가 없어지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녀의 말과 표정에서 그녀 역시 카스트 제도로 이별의 아픔을 겪었을 거란 상상이 들었다. (두세 번 결혼하고도 남을 미녀였다.)  

부르지 누나는 ‘틸로니아’에서 나와 ‘퀴신가르’라는 동네 버스 터미널까지 우리를 바래다주셨고, 우리의 맨발대학 탐방은 무사히 끝이 났다.

맨발대학 사람들은 하나같이 희망이라는 불씨를 나눠 들고 있었다.

-

-

희망은 불씨라
서로 나눠 가져도 손해 볼 게 전혀 없다.
게다가
주변에 모든 불꽃이 다 꺼져 버려도,
딱 단 한 사람만 불씨를 간직하고 있다면,
다시 모든 사람이 불꽃을 피울 수 있다.
그게 맨발대학에서 내가 찾은 희망이다.
- 맨발대학을 나오며 -









*맨발대학은,
인도에서 오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봉사 정신을 여전히 존경하고 지켜나가는 인도의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이다. 가난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기술들을 교육하며, 마을 공동체를 기반으로 주민들과 함께 단체를 꾸려 나가고 있다. 태양열 조리기구, 태양열 기술자, 의사, 약사, 커뮤니케이터, 세무사, 가면극 단원, 목수, 영상 편집자 등의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더 놀라운 건, 아무론 제약도, 강요도 없다. 누군가의 강요로 의해 교육받는 게 아니라, 철저히 자신에게 맞고, 하고 싶은 일을 배우면 된다. 이 교육을 통해 가난이 극복될 것이라 믿으며. 그리고 남녀, 신분 등의 차별이 사라질 것을 믿는다. 그 결과로 지난 36년간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하루 1달러 미만의 불가촉천민들이 약 천 명 가까이나 맨발대학을 통해, 의사, 야학선생님, 태양열 기술자, 건축가, 디자이너, 벽돌공, 컴퓨터 프로그래머, 회계사 등의 꿈을 이뤘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된 미래, 에콜로지 센터에서 미래를 묻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